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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맛집이야기/여행을그리다

골목이야기 - 서울 북아현동 골목을 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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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4월 산책을 나섰다. 충정로 경기대 앞을 지나 길을 따라 올랐다. 맑고 쌀쌀한 봄기운이 좋았다. 모든 것이 또렷하게 눈에 들어왔다. 동네 곳곳의 축대를 덮으며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노란색 개나리, 햇볕을 받으며 화단에 기대 지나는 이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할아버지들, 사람 하나 겨우 올라갈 좁은 계단 위에 작은 방을 덧대어 지은 집, 그리고 산꼭대기에 삐딱하게 선 나무 위에 외롭게 둥지를 튼 까치집과 높다란 축대 위에 매달리듯 올라선 집들. 풍경에 들어온 모든 것들이 조화로워 보였다. 집들도, 자연도, 사람도, 바위와 벽돌까지도. 주어진 환경에 서식하는 모든 생물들처럼, 사람이 살기 위한 공간을 만드는 것이 건축의 본질임을 나는 알게 되었다. 봄날 짧은 산책 속에 중요한 깨달음을 안겨준 동네가 바로 북아현동이었다.




산자락 아래에서 계단길을 오르다 보면, 골목이 집을 감싸 안은 듯한 풍경과 만난다.

 

 

온전히 사람들이 만든 동네

충정로역 8번 출구에서 나와 2번 버스를 타고 ‘금화장 고개’에서 내리면 ‘경기대 오거리’다. 이 오거리의 길들은 저마다 다른 시간의 켜를 향해 뻗어 있다. 남동쪽 충정로 방향은 1930년대에 들어선 ‘문화주택 단지’로 이어지고, 서쪽이나 남서쪽으로 가면 1930년대 말에 들어선 도시한옥군과 1940년대에 지어진 커다란 관사주택지로 이어진다. 북쪽으로는 1960년대 말에서 1970년대 초에 판잣집들을 철거하고 들어선 시민아파트 단지가 모습을 보인다.

 





  • 1 '금화장 2길'풍경이다. 옥상에서 자란 나무가 길 쪽으로 가지를 뻗은 모습이 인상적이다.
  • 2 능선길이 아래에서 올라온 계단길과 만난다. 저 아래로 북아현동 일대가 보인다.
  • 3 경기대 오거리에서 남동쪽으로 가면 일제시대 문화주택의 모습을 만날 수 있다.

그 길들 사이로 비스듬히 올라 이내 남쪽으로 능선을 타고 뻗는 길이 하나 있다. ‘금화장 2길’이다. 북아현동 산동네의 중심축이자 유일하게 차가 다니는 길이다. 6.25 전쟁 그리고 1960년대 산업화에 밀려 농촌에서 도시로 몰려온 사람들은 골짜기와 구릉을 가리지 않고 자리를 잡았다. 도로도, 공원도, 어떤 계획도 정해진 것이 없는 그곳에 사람들은 스스로의 힘으로 길을 만들고, 집을 짓고 동네를 이루었다. 서울에서도 손에 꼽히는 매력적인 골목동네는 그렇게 하나둘 만들어졌다. 지도를 보면 알 수 있듯이 북아현동 산동네와 주변 지역은 전혀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일정한 간격을 두고 반듯한 도로망에 가지런히 집들이 들어선 주변 지역과 달리, 불규칙하고 같은 것이 하나 없는 골목과 작은 집들로 채워진 자생적인 동네의 모양은 위에서 보아도 확연히 그 차이가 드러난다.

만나고 헤어지는 골목의 원칙들

매우 복잡해서 어디가 어디인지 알 수 없는 골목이지만, 북아현동의 골목들이 서로 만나고 갈라지면서 저마다의 모양을 만들어 가는 데는 몇 가지 기본 원칙이 있다. 첫째는 모든 골목들은 능선으로 통한다는 점이다. 둘째,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는 골목길들은 주변 지역의 길에서부터 갈라져 능선길로 향한다. 산동네가 생기기 전, 1930~40년대에 만들어진 주변지역 산자락 아래 쪽 길들로부터 골목이 형성되었음을 의미한다. 셋째, 심한 높이차 등의 이유로 지형의 차이가 클 경우, 골목들은 더 뻗지 못하고 막다른 골목이 되거나 되돌아오는 형상을 한다. 마지막으로 넷째는, 골목은 중간중간에 이어진다는 점이다. 다니기 편한 곳에 길을 내거나, 높이가 비슷한 곳을 이어 길다란 ‘이음길’을 만들어낸 것이 그 예다.


산자락 아래쪽 길에서부터 경사면을 따라 가지를 치며 능선길(노란색)을 향해 올라가는 다양한 형상의 계단길들.

 

 






  • 1 계단길에서 보이는 커다란 삼각형 박공 지붕집. 뒤로 붙은 옥상이 호기심을 자극한다.
  • 2 능선으로 올라가는 계단길과 옆에서 온 이음길이 만났다.
  • 3 산아래 주택지에서는 보이는 북아현동 산동네 집들의 모습. 여기서부터 골목길이 이어진다.

 

 

올해 가을부터 서울역사박물관이 진행하는 ‘북아현동 서울생활문화 자료조사’에 참여하여 골목을 조사하고 그리는 작업을 하였다. 삼선동 장수마을의 경험을 바탕으로, 계단을 포함한 북아현동 골목의 형상을 옮기고, 일부 골목의 지붕과 옥상의 자세한 모습을 표현했다. 또한 경사진 계단길의 건물들을 실측해 그려보았다. 골목에 나온 평상이나 화분, 자전거, 문의 위치 등을 나타내고 모임장소를 표시하여, 주민들이 외부공간에서 어떤 작업이나 활동을 하는지 관찰하였다. 사라질 것들을 기록으로 남겨놓는 의미 있는 작업이지만, 동시에 소중한 것들이 사라지리라는 안타까움이 마음에 쌓이는 시간이기도 하였다.

 



계단길에 면한 건물들의 입면을 자세히 그린 그림. 70년대에 무허가건축물을 양성화하면서 많은 집들이 콘크리트나 벽돌로 새로 지어졌다.

 

 

‘환상’적인 골목

그럼 가장 인상에 남았던 골목은 어디일까? 능선인 ‘금화장 2길’을 따라 내려가면 한쪽은 그대로이고, 다른 한 길은 왼쪽으로 오르막이 되면서 둘로 갈라지는 곳이 나타난다. 슈퍼가 있고 건너에는 동네 어르신들이 삼삼오오 건물 앞 계단에 앉아 이야기를 나눈다. 그 건물들 사이로 그리 급하지 않은 경사를 내려가면, 반지처럼 고리모양을 한 ‘환상(環狀)형의 골목’이 자리한다. 골목은 여덟 집 정도를 가운데 두고 그 둘레를 따라 한 바퀴 돈다. 지나치게 크지도 작지도 않은 고리모양의 골목형상이 느껴지는 적당한 크기다. 하지만 여기서 놀라운 것은 다음부터다. 능선에서 내려와 맞은편으로 돌아가면, 낮은 집들 사이로 서쪽으로 급하게 내려가는 곧은 골목이 나타난다. 집들 사이로 보였던 시가지의 원경은 아래로 내려갈수록 시야가 열리고, 그 끝에 서면 북아현동 일대가 한눈에 펼쳐진다. 마치 지형 위에 건물로 짜서 만든 거대한 카펫을 깔아 놓은 듯하다. 최고의 절경이다.


환상형 골목을 위에서 본 것처럼 묘사한 그림. 특이한 골목의 형상과 함께 다양한 사람들의 활동이 보인다.




북아현동 일대의 전경이다. 환상형 골목에서 서쪽으로 뻗은 짧은 골목 끝에서 볼 수 있다.

 

 

한편, 이렇게 특이한 형상의 골목과 집들이 집합을 이룬 환상형 골목지대는 환경적으로도 편안한 장소이다. 보통의 계단길이 산비탈을 따라 바람이 지나는 통로 역할을 하지만, 둥글게 켜를 이루며 건물들로 둘러싸인 이곳은 바람이 적어 동네 아주머니들이 모여드는 안마당 역할을 한다. 길 밖에는 남자들이, 골목 안에는 여자들이 모이는 장소의 대비가 흥미롭다. 한 편 어르신들의 모임은 날씨에 따라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지만, 안쪽은 아주머니들이 모여 음식을 나눠 먹고, 같이 일을 하면서 늘 이야기꽃을 피운다. 간간히 사람은 바뀌어도 ‘자리’는 계속되는 셈이다. 골목을 따라 돌아보면 빨래를 말리거나 시래기를 걸어두고, 평상에 나와 일하는 모습이 눈에 띈다. 다른 곳보다 볕이 잘 들고, 평평한 지형의 덕을 보는 것이다.

 





  • 1 위에서 본 것처럼 환상형 골목을 묘사한 그림이다.골목도 신기하지만,집들도 모두 달라 흥미롭다.
  • 2 골목 가운데 있는 건물 옥상 풍경이다 벽돌로 비닐주머니를 눌러 놓은 이유는 무엇일지 궁금하다.
  • 3 골목 안마당에서 아주머니들이 모여 함께 땅콩껍질을 까고 있다.

 

 

골목의 가치에 대한 생각

북아현동의 골목은 똑같은 모양이 하나도 없다. 막다른 길, 고리길, 쌍고리길, 이음길, 계단길, 갈고리길, 돌음길, 축대길, 가지길, 사다리길, ㄷ자길, 샛길, 능선길, 십자가길, 빨래길, 화분길, 평상길, 의자길…. 보고 겪은 사람 마음대로 이름 붙여도 좋겠다. 그렇게 하다 보면, 골목 이름 하나하나에 조금씩 관심이 싹트기 시작한다. 이곳에 살지 않아도 아끼는 마음이 생겨난다. 때로는 이 집이라면 한 번, 살고 싶은 집들도 눈에 띈다.

 

외국의 도시를 방문했을 때 계단이 많고 차도 다니기 어려운 동네에 대하여 우리는 불평하지 않는다. 그곳의 조화로운 경관과 사람들이 사는 모습을 보기 위해, 오히려 고생을 마다 않고 비용을 지불해 가며 여행을 하고 온다. 많은 사람들이 오랜 시간 살아오며 만들어낸 것들의 가치를 우리는 이미 잘 알고 있다. 흥미롭고 진솔한 삶의 풍경을 볼 수 있다는 점에서 북아현동의 골목과 집들도 이들 동네와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크게 다른 점이 있다면 그것은 단 하나. 있던 것들을 잘 두면서 ‘살기 좋은 동네’를 만들려고 했는지, 아니면 ‘살기 편한 단지’를 만들기 위해 있던 동네를 없애려 했는지, 이 단순한 차이 뿐이다. 언제나 그렇듯 미래는 우리 손에 달려 있다.

 



계단길에서 사방으로 골목길이 뻗으면서, 가깝고 먼 여러 풍경들이 동시에 펼쳐진다.
집 앞 가득 놓인 화분이 겨울에도 여유를 느끼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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