읍성로 중 ‘약전골목’이 있는 남성로로 향했다. 대구는 ‘약령시’로 불릴 만큼 큰 한약재시장이 열리던 곳이다.
조선 효종
6년(1658)부터 대구 읍성 객사 부근에서 봄가을 두 차례에 걸쳐 한약재를 거래했다. 우리나라는 물론, 만주, 중국, 골골, 아라비아, 일본,
베트남 등 여러 나라로 한약재를 거래해 국제시장으로서 명성을 떨쳤다. 지금도 골목에 깃든 한약냄새 덕분에 걷기만 해도 병이 낫는다는 속설이
있다.
약전골목에 위치한 약령시 한의약문화관 바로 옆에는 대구유형문화제 제30호로 지정된 제일교회 건물이 있다.
1937년 지어진 고딕양식의 교회 건물은 담쟁이덩굴로 뒤덮여 멋스러움을 뽐낸다. 교회 맞은편 뽕나무 골목에 들어서면 항일역사의 발자취를 좇게
된다.
“일본 경찰이 서재 천장을 뜯어 원고를 다 빼앗아 갔어요. 그래서 이상화 선생은 생전에
시집 한 권 못 내셨죠. 바로 이 방에서 하직하실 때 ‘일본은 반드시 망한다’고 말씀하셨어요” 이상화기념사업회 윤장근회장을 뽕나무 골목
끝자락에서 만났다. 계산동 2가 84번지에 위치한 고택은 항일문학가로 잘 알려진 이상화 시인이 1939년부터 작고하던 1943년까지 거하던
곳이다. 2001년 오래된 고택이 도로로 변할 위기에 처하자 고택보존을 위한 100만인 서명운동이 일어났다. 대구 시민의 힘으로 이상화 시인의
고택은 빼앗긴 들의 봄을 염원했던 모습 그대로 복원됐다.
이상화 시인 고택 바로 옆에는 대구 출신 민족자산가이자 국채보상운동 주창자인 서상돈 선생 고택이 있다. 이 골목을
돌아 큰 길로 나오면 바로 1901년 지어진 계산성당이 나온다. 맞은편 제일교회가 서있는 언덕은 제중원(당시 동산의료원)이 있던 곳이다. 이
언덕으로 이어지는 90계단길이 바로 ‘3.1운동길’이다. 1919년 3월 8일 대구 조선독립만세운동을 준비하던 계성학교, 신명학교, 성서학당,
대구고보 학생들은 경찰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동산병원 솔밭 오솔길을 이용했다. 동산병원 소나무숲과 오솔길은 사라졌지만 그 솔밭과 연결된 좁은
길은 여전히 3.1운동길로 불리고 있다. 동산언덕 내에는 일제강점기에 지어진 선교사주택 3 채가 있다. 현재 의료, 선교, 교육역사박물관으로
각각 쓰이고 있는데 대구 읍성을 허물 때 나온 돌로 주택 기단을 쌓은 점이 특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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