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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관련/프로야구

‘내일은 내가 허슬두!’ 두산 김동한의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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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월 27일부터 29일까지 이천 두산베어스필드에서 두산과 NC 간의 3연전이 열렸다. 3루 측 벤치에 앉은 김광림 NC 코치는 NC 공격 때는 물론이고 두산 타자가 타석에 들어설 때도 두 눈을 반짝였다. 올 시즌이 끝나고 각 구단에서 영입할 20인 보호선수 외 1명을 누구로 할지 관찰하기 위해서일까. 그렇지가 않다. 김 코치는 “신인을 제외한 대다수가 작년까지 애정을 쏟은 선수라서 유니폼은 달라도 관심이 쏠리는 게 인지상정 아니냐”며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이천 숙소에 머물고 있는 선수 가운데 김동한보다 나이가 많은 이는 없다. 2년 차라서 이천 숙소에 꼭 있을 필요는 없다. 그럼에도 그가 이천에 있는 이유는 훈련에 열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진=손윤)


누구 한 명 할 것 없이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애제자이지만 김 코치가 특히 주목한 선수는 3루수로 출전한 김동한이다. 현역 시절 김 코치는 적지 않은 나이인 35세 때 타율왕에 오를 정도로 항상 온 힘을 다하는 열정의 소유자였다. 그런 김 코치가 김동한을 주목한 것은 거울 속 자신을 보는 듯했기 때문이다.

“작년에 들어온 신인이었는데 아주 성실한 선수다. 나랑 달리 우타자라는 차이는 있지만 비슷한 체구에 밤낮으로 열심히 하는 게 마음에 들었다.”

김동한은 내발산 초등학교 2학년 때 야구에 입문했다. 만화책과 장난감을 좋아할 어린 나이에 야구 배트와 글러브를 선택한 이유는 무엇일까. 김동한의 말을 들어보자.

“유치원 다닐 때부터 그냥 야구가 좋았어요. 만화영화보다 야구를 보는 게 더 좋았고 만날 친구들이랑 공터에서 동네야구를 했어요. 초등학교 2학년 때 야구선수가 되고 싶다고 부모님께 말씀드렸죠. 어머님은 계속 야구를 하는 게 쉬운 일이 아니라고 다소 반대하셨어요. 하지만 아버님께서 하고 싶은 걸 하라며 적극 찬성해서 야구를 시작하게 된 거죠. 게다가 야구를 하려면 제대로 된 곳에서 해야 한다며 인천에서 서울로 이사했어요. 저 하나 야구선수로 키우기 위해 가족 전체가 희생한 거죠. 항상 가족에게 미안함이 있어서 그런지 남들보다 배트 한 번 더 스윙하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모든 일이 그렇지만 좋아서 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은 차이가 난다. ‘성실함.’ 김광림 코치를 비롯해 그를 가르친 지도자는 누구 할 것 없이 입을 모은 말이다. 장충고 시절 감독이었던 유영준 NC 스카우트는 “자기가 할 일은 시키지 않아도 알아서 하는 선수였다”고 떠올렸다. 그는 장충고를 졸업하고 바로 프로에 가지 않고 동국대에 진학했다. “프로는 처음부터 생각을 안 했어요. 고등학교 2학년 때 동국대에 가기로 했거든요. 제가 체구가 그렇게 커지 않아서 대학에서 힘을 기른 뒤 프로에 가는 게 경쟁력이 더 있을 것으로 생각했어요.”

그러나 김동한을 기다린 것은 희망보다 좌절이었다. 대학 1학년 때 어깨부상을 당해 2학년 때까지 재활에 힘을 쏟은 것. “조급함이 부상을 더 키웠죠. 1학년이라서 연습 때 배팅볼을 많이 던진 게 누적돼서 어깨 부상을 당했어요. 2007년 8월에. 근데 6개월 재활하고 타이완 캠프에서 펑고 훈련을 시작했는데 어깨랑 팔꿈치가 다시 아픈 거예요. 제대로 몸이 안 된 상황에서 무리하게 훈련하다가 재발한 거죠. 그래서 다시 5개월 더 재활했어요. 2008년 8월까지. 1, 2학년 때는 거의 야구를 못 했죠.”



누군가를 좋아하는 데 이유가 없다. 단지 좋을 뿐이다. 김동한은 야구가 그렇다. 좋아하는 야구를 위해 자기가 할 수 있는 것은 김광림 코치가 그랬던 것처럼 항상 온 힘을 다하는 것밖에 없다. (사진=이지혜)


재활은 지루한 시간과의 싸움이다. 인내력에 따라 재활의 성패가 갈린다. 하루 잠깐 야구공을 만지고 다시 재활에 들어간 김동한은 야구를 시작해서 처음으로 힘들다는 생각을 했다. 잠시 방황하던 그를 잡아준 것은 가족이었다. “부모님께서 ‘이 정도 힘든 것도 이겨내지 못하면서 무슨 프로야구 선수냐!’며 ‘정신 차려라’고 말씀하셨어요. 그 말을 딱 듣는데 불안감이 사라지더라고요. 드래프트나 프로에서의 경쟁과 비교하면 이건 그렇게 큰 벽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 거죠.”

대학 3학년 때부터 하고 싶던 야구를 마음껏 하게 됐지만 1년의 공백은 생각 이상으로 컸다. 5개 대회 14경기에 출장해 타율 0.217에 그쳤다. 동국대 타선의 고속도로 휴게소라는 조롱도 들었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1년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남들보다 더 뛰고 더 배트를 돌렸다.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 법. 2010년 전국대학야구 춘계리그에서 타율 0.381을 기록한 데 이어 5월에는 한·미 야구선수권대회 국가대표에 뽑히는 영광을 누렸다. 하계리그에서도 0.462라는 고타율을 기록하며 프로 스카우트에게 자신의 존재감을 강하게 보여줬다.

“드래프트를 앞두고 아주 불안했어요. 고교 때는 프로가 안 되면 대학이라는 선택지가 있지만 대학은 벼랑 끝이잖아요. 드래프트 날 학교에서 훈련하고 있었어요. 다른 학교 선수들은 훈련을 안 하고 TV나 인터넷으로 지켜봤지만요. 계속 두근두근 가슴이 뛰어서 훈련에 집중하기 어려웠어요. 계속해서 가방 속 휴대전화 문자메시지를 확인했어요. 근데 아무리 봐도 축하 문자가 안 오는 거예요. 8라운드에 뽑혔으니까요. 엄청나게 초조했죠. 한참 뒤에 보니까 아는 분으로부터 축하문자가 왔더라고요. 낮은 순번에 뽑혔다는 아쉬움은 전혀 없었어요. 지명받은 것만으로 매우 기뻤어요. 좀 있다가 장충고 동기인 (이)용찬이한테서 전화가 왔어요. ‘같은 팀에서 뛰게 되어서 기쁘다. 축하한다.’고 말하더라고요.”

사실 대학 4학년 때 반짝 활약을 펼쳤다고 해도 대학 4년 통산 타율 0.269에 그친 선수를 주목하는 이는 그렇게 많지 않다. 하지만 이복근 두산 스카우트 부장의 생각은 달랐다. “타율이나 도루(통산 9개) 등 기록으로 나타난 숫자가 아닌 잠재력을 높이 샀다. 장충고 시절부터 쭉 지켜봤는데 공을 맞히는 능력이 뛰어났고 아주 빠른 발을 갖고 있었다. 2, 3년 공을 들이면 좋은 재목이 될 것으로 봤다.” 하지만 김동한은 지난해 타율 0.255에 도루 12개를 기록하는데 그쳤다. 유망주를 잇달아 발굴한 이 부장의 ‘매의 눈’이 흐려진 것일까. 그렇지가 않다. 김동한은 “전반기에 부진해서 타율 0.255에 그쳤다”고 말했다. 그가 전반기 때 부진했던 이유를 김광림 코치에게서 들을 수 있었다.

“길게 보고 타격자세를 수정했다. 신인이니까 올바른 타격자세를 만들어 가는 게 더 중요하다고 봤다. 눈앞의 성적이 안 좋으니까 (김)동한이 마음이 흔들리는 게 보였다. 하지만 나는 뚝심 있게 밀고 나갔다. 기본을 중시하는 게 장기적으로는 옳다는 확신이 있었으니까. 그리고 실제로 그랬다. 타격자세가 자리를 잡은 후반기부터 성적도 올라가기 시작했다.”



김동한은 올 시즌 3루수로 변신했다. 유격수와 2루수는 본 적이 있지만 3루수는 처음이다. 익숙하지 않은 3루가 부담스러울 수도 있는 상황. 하지만 그는 “멀티 포지션을 소화할 수 있다는 것은 경쟁력을 높이는 길”이라며 오히려 반겼다. (사진=이지혜)


NC와의 3연전에서 김동한은 8타수 2안타를 기록했다. 타율로 따지면 0.250. 만족스럽지 않은 결과이지만 김 코치는 빙긋 웃었다. “안타가 되지 않은 것도 타구의 질이 아주 좋았다. 내가 NC로 가게 되면서 살짝 걱정했는데 작년에 내가 그렸던 타격폼과 거의 비슷했다. 김우열 선배님이나 전상렬 코치가 잘 지도한 걸 느낄 수 있었다.”

김동한의 올 시즌 목표는 타율 3할에 도루 30개다. 5월 5일 현재 기록은 타율 0.298에 도루 3개. 목표 달성까지는 갈 길이 멀다. 김동한은 길이 멀다고 해서 지름길을 찾지 않는다. 매일 뚜벅뚜벅 걷다가 보면 숫자는 쌓이기 마련. 또한, 이것이 최종 목표가 아니라는 사실도 잘 알고 있다. 1군 무대를 향한 하나의 관문일 뿐이다. 몇 개의 관문을 넘어 잠실야구장 타석에 설 땐 또 다른 목표를 향할 것이다. 야구와 인생에서 목표는 종착역이 없다는 공통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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