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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관련/스포츠이야기

유로2012 스페인-이탈리아 승패 빼고 다 있었던 ‘최고의 무승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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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승부지만 보는 이들의 손에 땀을 쥐게 한 명승부 (사진=풋볼리스트)

[풋볼리스트=그단스크(폴란드)] 서호정= 그단스크는 이번 유로2012를 치르는 폴란드의 개최도시 중 가장 북쪽에 위치해 있다. 발트해를 끼고 있는 항구도시로 폴란드의 민주화를 이끈 바웬사 전 대통령이 조선소를 중심으로 한 자유노조를 결성한 의미 있는 도시기도 하다. 바르샤바에서 기차로 5시간 거리인 이 곳에서는 조별리그 최고의 경기가 준비 중이었다. 사상 최초의 유럽선수권 2연패를 노리는 ‘디펜딩 챔피언’ 스페인과 유로2000 이후의 긴 부진을 깨고 권토중래를 다짐한 이탈리아의 C조 맞대결이 바로 그단스크에 배정된 것이다.

그단스크에 도착한 것은 현지 시간으로 10일 오전 11시경. 중앙역에는 이미 일 무리의 스페인과 이탈리아 팬들이 모여 있었다. 중심지인 구도심으로 향하자 수는 점점 불어났다. 점령군은 붉은 물결의 스페인 팬들이었다. 최근 하루가 멀다 하고 들려오는 경제위기가 무색할 정도로 무수한 팬들이 응원을 위해 기차로, 비행기로 그단스크에 당도했다. 푸른 유니폼의 이탈리아 팬들은 수적 열세였지만 지지 않고 목소리를 내며 응원가를 불렀다. 경기 시작 몇 시간 전부터 이미 장외 승부가 펼쳐진 상태였다.

이탈리아를 글래디에이터에 비유한 이탈리아 팬, 발로텔리만이 칼을 제대로 꽂지 못했다 (사진=풋볼리스트)

중앙역에서 북서쪽을 향해 기차로 다시 5분 가량을 들어가자 새롭게 지어진 아레나 그단스크가 위용을 뽐냈다. 2008년 건축에 들어가 2011년 완성된 아레나 그단스크는 발트해의 황금해안을 모티브로 삼은 금색 외관이 눈길을 모았다. 운이 좋게도 이 경기장에서 치러지는 유로2012의 첫 경기도 세계 축구의 황금과 같은 두 팀의 승부였다. 예상대로 승부는 쉽지 않았다. 아이러니하게도 모든 이들의 눈길을 모은 빅매치는 무승부로 끝났다. 하지만 승패만 없었을 뿐이지 90분 간 양팀은 축구가 보여줄 수 있는 최고의 퀄리티를 선사했다.

준비한 덫에 스페인을 몰아넣었던 이탈리아 (사진=연합뉴스)

▲ 변칙과 파격을 택한 모순의 대결
스페인과 이탈리아의 대결은 흔히 모순의 대결이라는 표현으로 압축된다. 패스라는 최고의 창과 빗장수비라는 최고의 방패를 든 양팀의 대조적인 팀 컬러 때문이다. 그런 두 팀이 맞대결을 앞두고는 변칙과 파격을 택했다. 자신들의 강점을 극대화한 선택이었다.

무적함대는 최전방 공격수를 과감히 포기했다. 지난 대회 득점왕이었던 다비드 비야가 부상으로 참가하지 못했지만 스페인에겐 두 명의 페르난도, 토레스와 요렌테가 있었다. 하지만 비센테 델 보스케 감독은 어떤 페르난도도 선발 투입하지 않았다. 그 자리에 선 것은 미드필더인 세스크 파브레가스였다. 파브레가스를 최전방에 두긴 했지만 실제로는 여섯명의 미드필더를 쓰는 4-6-0의 제로톱 포메이션을 들고 나온 것이다. 최근의 축구 경향을 이끌고 있는 바르셀로나가 여러 차례 보여준 바 있는 이 축구는 뛰어난 패스와 압도적인 볼 점유율을 자랑하는 팀이 상대를 몰아치기 위해 만든 발상의 전환이다. 델 보스케 감독은 포스트 플레이에 대한 미련을 두지 않고 상대를 미드필드에서부터 철저하게 벗긴 뒤 완벽한 골을 만들겠다는 계획을 수립했다.

이에 맞서는 이탈리아는 스리백을 내세우며 빗장수비의 자물쇠를 더욱 단단하게 했다. 양 윙백이 내려가면서 실제로는 수세 시 다섯 명의 수비수가 들어가는 스리백은 자칫 구시대의 유물로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체사레 프란델리 감독은 단순히 수비 숫자의 우위로 지키는 축구가 아닌 유연한 변화와 수비라인 전진을 꾀할 수 있는 새로운 스리백을 내세웠다. 수비형 미드필더인 다니엘레 데 로시를 리베로처럼 스리백의 컨트롤 타워로 세웠다. 데 로시는 자신의 판단에 근거, 커버링과 태클을 구사하고 시의적절한 공격 가담을 펼쳤다. 그의 소속팀 AS로마에서 이미 경험했던 것을 이탈리아 대표팀에 적용하는 데는 큰 무리가 없었다. 프란델리 감독은 경기를 앞두고 “우리는 높은 볼 점유율을 자랑하는 팀을 상대로 효과적인 대응을 할 것이다”고 자신했다. 주도권은 스페인에게 내줬지만 이탈리아는 경기 시작 후 좀처럼 페널티 박스 안에서의 위기를 허용하지 않았다. 오히려 안드레아 피를로의 패스를 시작으로 안토니오 카사노로 이어지는 역습은 스페인을 곤경에 처하게 했다.

스페인의 제로톱은 절반의 성공을 거뒀다 (사진=연합뉴스)

양팀의 감독은 자신들의 준비한 파격적 변화가 일으킨 부조화에 대해 정반대의 대응 방식을 보였다. 프란델리 감독은 카사노의 파트너로 세운 마리오 발로텔리가 초반부터 주심 판정에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고 스페인 수비로부터 공을 소유하지 못하자 후반 11분 만에 안토니오 디 나탈레를 교체 투입했다. 디 나탈레는 그라운드로 들어간 지 5분 뒤인 후반 16분, 수비라인 뒤로 찔러 준 피를로의 환상적인 패스를 잡아 골로 연결하며 그런 기대에 부응했다. 프란델리 감독의 적절한 용병술이었다.

스페인은 전반 막판부터 살아난 패싱게임을 앞세워 안드레스 이니에스타, 다비드 실바, 사비 에르난데스가 이탈리아 수비진을 헤집기 시작했다. 그러나 파브레가스가 마무리에 실패하며 앞서 나갈 기회를 번번히 놓쳤다. 이탈리아가 선수 교체를 통해 선제골을 넣었지만 델 보스케 감독의 고집은 변하지 않았다. 그는 파브레가스에 대한 절대적 믿음을 보였다. 결국 선제골을 내준 지 불과 3분 뒤인 후반 19분 파브레가스는 그 믿음에 보답했다. 이니에스타와 실바를 거쳐 자신에게 온 침투 패스를 잡아 페널티 박스 안의 좁은 공간에서 골을 터트렸다.

이탈리아전에서 놀라운 선방을 보인 카시야스 (사진=연합뉴스)

▲ 슈퍼맨과 성자의 재회, 구름 위의 대결
양팀에게 허락된 골은 각각 한 골씩에 불과했다. 골을 넣기 위해 서로가 뚫어야 했던 최후의 수문장은 특별한 손을 지닌 이들이었다. 세계 최고의 골키퍼로 평가 받는 이케르 카시야스와 지안루이지 부폰이었다. 둘은 각 대표팀의 주장이자 부동의 No.1 골키퍼로 경기력 내외적으로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하는 선수들이었다. 카시야스는 성자(Saint Iker, 산 이케르), 부폰은 슈퍼맨이라는 별명이 있을 정도로 두 선수의 능력은 인간 이상의 것으로 칭송 받는다. 카시야스는 지난 시즌 소속팀 레알 마드리드의 우승을, 부폰은 소속팀 유벤투스의 무패 우승을 각각 이끌며 이번 대회 전 스스로의 위상을 공고히했다.

카시야스와 부폰의 재회는 운명과 같았다. 4년 전에도 둘은 맞대결을 펼쳤다. 유로2008 8강에서였다. 당시 둘은 90분 정규시간과 30분 연장전까지 총 120분 간 골을 허용하지 않았다. 결국 승부차기에 돌입했고 데 로시와 디 나탈레의 슛을 막은 카시야스가 다니엘 구이사를 막는 데 그친 부폰에 승리했다. 그 대가로 카시야스는 스페인이 독일을 꺾고 우승을 차지하자 주장 자격으로 시상대에 올라 앙리-들로네를 치켜세울 수 있었다. 2010년 남아공월드컵 도중 허리를 다치며 선수 인생의 위기를 맞았던 부폰에게 카시야스와의 재회는 최고의 자리로 돌아가기 위한 피할 수 없는 과정과 같았다.

둘은 90분 내내 양보 없는 선방 대결을 펼쳤다. 카시야스는 피를로의 프리킥을 막아낸 것을 시작으로 전반 막판 마르키시오의 왼발 발리 슛, 티아고 모타의 결정적인 헤딩 슛을 모조리 막아내며 기선을 제압했다. 부폰은 후반 4분 파브레가스의 강력한 슈팅을 막았다. 둘은 실점 장면조차 비슷했다. 카시야스는 수비진이 무너지며 디 나탈레와 맞은 1대1 상황에서 실점을 했다. 부폰도 스페인의 현란한 패스워크에 수비가 뚫리며 파브레가스와 단독으로 맞섰고 동점골을 내줬다. 이후에 빛난 쪽은 부폰이었다. 부폰은 교체 투입된 토레스가 오프사이드 트랩을 무너트리며 자신과 1대1로 맞선 위기에서 토레스의 드리블 진행 방향을 예측하고 공을 가로 채는 모습을 보여줬다. 종료 직전에는 서로 한 차례씩 선방을 추가했다. 긴장감 넘치는 그 순간에도 카시야스와 부폰 두 선수만큼은 그것을 초월해 자신들의 대결을 이어가는 것 같았다.

카시야스와 치열한 선방 대결을 펼친 부폰 (사진=연합뉴스)

두 영웅은 경기 종료 후 서로에게 다가가 진한 포옹을 나눴다. 카시야스는 경기를 앞두고 “부폰은 내 롤 모델이다”라는 말로 존경심을 나타냈다. 그만큼 서로를 인정한다는 뜻이다. 라이벌을 넘어 자신을 정상의 위치로 올려놓는 훌륭한 자극제로 서로 바라보는 모습이었다. 이니에스타와 사비, 피를로와 카사노 역시 부폰과 카시야스처럼 뛰어난 클래스를 보여주며 이날 승부의 격을 높였다. 반대로 양팀은 공격진의 부진에 숙제도 안아야 했다. 스페인은 토레스의 부활이 간절하다. 후반에 파브레가스를 대신해 투입된 토레스는 좋은 움직임으로 스스로 찬스를 잡았음에도 불구하고 과감하지도, 빠르지도 않은 판단력으로 인해 기회를 헌납해야 했다. 부폰과 두 차례 1대1 상황을 맞고도 골을 기록하지 못한 것이 대표적이었다. 이탈리아는 마리오 발로텔리의 평정심이 간절하다. 카사노와 짝을 이뤘지만 발로텔리는 초반부터 판정에 대한 불만을 표시하며 툴툴댔다. 후반 초반 라모스의 공을 빼앗아 카시야스와의 1대1 찬스를 잡았지만 머뭇거리다 뒤쫓아온 라모스에게 다시 뺏기고 마는 우스꽝스러운 모습도 연출했다.

너무 일찍 만났던 스페인과 이탈리아. 우승부호다운 모습을 맞대결에서 보여준 둘은 더 높은 위치에서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하며 다음 조별리그 준비에 들어갔다.

경기 전 부폰과 토레스가 맞을 미래를 예측한 이탈리아 팬의 걸개 (사진=풋볼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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