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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이야기/사건사고

과학수사 완전범죄도 예리하게 잡아내는 첨단과학수사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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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는 바야흐로 서기 1000년, 로마 법정에서는 한 여인의 죽음을 두고 재판 중이었다. 목격자가 없는 탓에 누가 범인인지 오리무중이었다. 당시 변호사였던 퀸틸리아누스(Quintilianus, 35?~95?)는 현장 여기저기에 널려 있는 피 묻은 지문들을 이상하다고 여겼다. 실수로 묻혔다고 보기엔 너무 많고, 일부러 묻혔다고 보기엔 너무 일정하게 나열돼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범인은 눈이 보이지 않아 손으로 벽 따위를 더듬으면서 도망쳤을 것”이라며 유력한 용의자로 맹인인 ‘피해자의 아들’을 지목했다. 이 사건은 법과학을 이용한 최초의 수사기록으로 알려져 있다(물론 현재 법과학의 시각에서는 아주 위험한 수사방식이다). 그래서일까. 법과학(Forensic Science)이라는 단어는 공청회를 뜻하는 라틴어(forensis)에서 유래했다.

 



과학수사는 언제부터 시작된 것일까? <출처: gettyimages>

 

 

셜록 홈즈는 과학수사 선구자

인류는 언제부터 과학수사에 대한 필요성을 느꼈을까. 과학을 접목해 사건을 해결하고 범인을 잡자는 생각을 처음으로 한 사람은 [셜록 홈즈 시리즈(1887~1905년)]를 지은 코넌 도일(Arthur Conan Doyle, 1859~1930)이다. 그는 영국의 유명한 소설가이자 외과의사였다. 이전까지 사람들은 과학과 수사는 별개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도일은 명탐정 홈즈를 통해 과학적 지식이 수사에 어떻게 이용될 수 있는가를 알렸다. 그는 과학적인 판단으로 수사하면 범인을 빨리 잡을 수 있을 뿐 아니라 억울한 사람이 줄어든다고 주장했다. 수사가 종결된 뒤 범인이 버젓이 거리를 활보하는 것도, 그것을 바라보며 분해 하는 피해자도, 억울하게 범인으로 몰리는 사람도 줄어든다.

 

1302년 이탈리아 볼로냐의 의사 바르톨로베오 다 바리냐나가 부검을 실시했다는 기록이 있다. 중세에는 신에게 받은 몸은 신에게 온전히 돌려보내야 한다는 생각이 팽배해 있었으므로 법의부검은 대단한 의미를 갖는 사건이었다. 그러나 부검을 통해 신체를 해부해 본다고 항상 사인을 명확히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독물에 중독돼 사망한 경우는 특히 그렇다. 사망한 사람의 혈액이나 위 내용물에 독물이 존재하는지 알아내는 것이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코넌 도일의 [셜록 홈즈 시리즈]를 통해 과학수사의 개념은 대중에게 익숙해지기 시작한다.



1302년 이탈리아에는 법의부검이 실시되었다. 사진은 렘브란트의 [니콜라스 튈프 박사의 해부학 강의].

 

 

1814년 프랑스의 독물학자인 마티외 오르필라(Mathieu Orfila, 1787~1853)는 독물을 검출하는 방법과 독물이 동물에게 미치는 영향을 발표하면서 독성학의 문을 열었다.

 

이미 죽은 시신을 놓고 어떻게 죽었는지를 알아내는 일도 중요하지만 범인이 두고 간 물건이나 현장에 있던 물건에서 결정적인 증거를 확보하는 것도 필요했다. 최초로 주목한 결정적인 증거는 지문이다. 1880년 영국 외과의사였던 헨리 폴즈(Henry Faulds, 1843~1930)는 지문의 중요성에 대한 논문을 최초로 발표했다. 1892년 영국의 유전·통계학자 프랜시스 골턴(Francis Galton, 1822~1911)이 [핑거프린트(지문)]라는 책을 펴내면서 지문이 실제 수사에 본격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골튼은 이 책에서 사람마다 지문이 모두 다르다는 사실을 통계적으로 입증했다. 그는 지금까지도 활용되는 궁상문과 제상문, 와상문 등 지문 분류 방법을 소개했다. 드디어 1892년 아르헨티나 경찰인 후안 부체티크(Juan Vucetich, 1858~1925)는 세계 최초로 지문을 이용해 살인사건을 해결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복잡 다양한 지문을 사람의 눈으로 일일이 비교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 이 문제는 100년이 훌쩍 지난 뒤에야 해결됐다. 컴퓨터가 지문을 비교하게 된 것이다. 1996년 미국 연방수사국(FBI)은 모든 사람의 지문을 입력하고 검색할 수 있는 지문 자동 식별 시스템(AFIS)을 개발했다. 수백 명이 지문 하나를 검색하는 데 몇 년이 걸렸던 것을 5분 이내로 줄였다.

 

1901년 오스트리아의 병리학자인 카를 란트슈타이너(Karl Landsteiner, 1868~1943)가 ABO식 혈액형을 발견한 것도 과학수사 발전의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혈액형은 유전자가 등장하기 전까지 중요한 신원확인 수단이었다. 유전자 감정이 등장한 오늘날에도 혈액형 감정은 중요하다. 유전자를 감정하려면 시간과 비용이 많이 들기 때문에 1차로 혈액형을 감정해 유전자 감정이 필요한 증거물만 선별하기 때문이다.




1996년 미국 연방수사국(FBI)은 모든 사람의 지문을 입력하고 검색할 수 있는 시스템(AFIS)을 개발했다. <출처: gettyimages>

 

 

“모든 접촉은 흔적을 남긴다”


프랑스의 범죄학자 에드몽 로카르(Edmond Locard, 1877~1966)는 아주 재미난 수사기법을 발견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크기가 큰 증거물에만 신경을 썼는데, 그는 크기가 작아 눈에 잘 보이지 않는 증거물에 주목했다. 이런 증거물은 그냥 무시하거나 존재하는지조차 인식하기 어려운 것들이었다. 옷에서 나온 작은 실밥, 어디선가 묻어온 듯 보이는 먼지 같은 것이었다. 로카르는 작은 증거물을 과학적으로 분석하면 수사에 결정 적인 도움을 줄 수 있다고 확신했다. 그는 미세한 먼지와 흙, 금속 파편 등을 감정해 범인이 현장에 있었고 피해자와 신체접촉이 있었다는 것을 성공적으로 입증했다. 그 뒤 리옹대에 세계 최초로 법과학감정소를 세웠다. 당시 그의 별명은 ‘프랑스의 셜록 홈즈’였다. 전 세계는 로카르의 성과를 눈여겨보았고 앞 다투어 리용 법과학감정소를 벤치마킹한 법과학실험실을 설립했다. 우리나라의 국립과학수사연구소(이하 국과수)도 그중 하나다.

 



미국 FBI가 만든 DNA 검색시스템(CODIS). 사람마다 다르게 나타나는 DNA상 특정 표지 13개를 분석하는 방법으로 용의자 가운데 범인을 추려낸다.


1951년 제임스 왓슨(James Watson, 1928~)과 프랜시스 크릭(Francis Crick, 1916~2004)이 DNA 구조를 규명하면서 유전정보를 이용해 개인식별을 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 크고 작은 증거물을 토대로 추리해야 했던 과거와 달리, 용의자를 범인이라고 단정 지을 수 있는 확실한 증거를 찾을 수 있게 된 것이다. 법과학이 가장 발달한 미국은 1987년 최초로 DNA 감정 결과를 증거로 인정했다. 

 

국내에서는 1992년 의정부 여중생 성폭행사건에서 최초로 DNA 감정 결과를 활용했다. DNA 감정은 신원확인 및 개인식별에 필수적인 수단이 됐고 경찰은 현장에서 DNA를 찾는 데 많은 시간과 노력을 투자하게 됐다. DNA를 검색하는 시간을 단축시켜준 것도 컴퓨터였다.

 

미국 FBI는 DNA에서 사람마다 다르게 나타나는 특정 표지 13개를 분석할 수 있는 시스템(CODIS)을 개발했다. 미국 전역의 법과학감정소에서 범죄자의 DNA 정보를 공유하면서 범인을 더 많이, 더 빨리 검거할 수 있게 됐다. 한국은 ‘개인정보 유출’을 염려하는 목소리에 밀려 지난해 7월이 돼서야 ‘DNA 신원확인 정보의 이용 및 보호에 관한 법률(DNA법)’이 국회에서 통과했다. 국과수에서도 살인이나 강간, 아동폭력 등 11개 주요 범죄자의 DNA형을 데이터베이스에 입력하고 검색해 연쇄강간범 등 수많은 미제사건 범인을 검거하는 성과를 올렸다. 데이터베이스가 커질수록 효과가 더 커질 것으로 기대한다.

 

 

증거물 데이터베이스 구축 시급

오늘날의 법과학은 ‘귀신도 속이지 못하는’ 수준까지 발전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국내 과학수사 시스템은 미국 등에 비해 많이 낙후된 실정이다. 특히 과학수사 교육에서 극명한 차이가 난다. 미국에서는 과학수사의 모든 분야를 아우르는 교육프로그램이 운영되고 있어 이를 이수한 사람만이 증거물을 취급할 수 있다. 그러나 국내에는 이런 프로그램이 없다. 창피한 이야기지만 필자도 국내에서 과학수사에 대한 체계적인 교육을 받은 적이 없다. 이런 얘기를 미국 법과학자에게 고백한다면 그는 필자를 법과학자라기보다는 증거물을 분석하는 기계쯤으로 여길지도 모른다. 국내 과학수사가 성장하려면 하루 속히 교육프로그램을 보완해야 할 것이다. 다행히 지난해부터는 국과수에서도 ‘감정인 자격인증제도’를 도입해 소정의 교육과 시험을 마친 사람만 감정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한국은 매장사체 발굴, 미세증거물 분석, 혈흔형태 분석, 데이터베이스 분야가 낙후돼 있다. 미국의 경우 매장시체가 발견되면 발굴 전문가가 출동해 고고학자가 유적지를 발굴하듯이 시신과 증거물을 발굴한다. 그러나 한국은 ‘빨리빨리’ 일을 처리해야 하는 관행에 밀려 아직 이런 체계적인 발굴기법이 발을 못 붙이고 있다.




범죄 현장에서 증거를 수집하고 있는 과학수사대 모습. <출처: (CC)Andrew Mason at Wikipedia.org>

 

또 미세증거물과 혈흔형태 분석은 2000년대 후반에야 도입하기 시작했다. 외국에서 1900년대 초에 태동한 학문인 점을 생각해보면 엄청나게 늦은 것이다. 데이터베이스도 많이 낙후돼 있다. 증거에 생명을 불어넣는 것이 바로 데이터베이스다. 현장에서 아무리 훌륭한 지문을 채취했어도 지문 정보가 없으면 용의자가 잡히기 전까지 그냥 쭈글쭈글한 선에 불과하다. 한국은 지문 데이터베이스에 있어선 세계 최고다. 어떤 나라도 전 국민의 지문 정보를 갖고 있지 않다. 하지만 웬만한 선진국들이 보유하고 있는 자동차용 페인트(뺑소니 사건에 활용)나 자동차 카펫 섬유(차량을 이용한 유기사건에 활용), 잉크 및 토너(위조지폐, 협박문서에 활용)에 대한 데이터베이스는 인력과 예산이 부족해 구축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다. 

 

한국은 다른 나라에 비해 과학수사를 늦게 시작한 편이지만, 선배 법과학자들의 노고가 결실을 맺어 몇몇 분야는 선진 외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다. 그러나 아직도 과학수사 선진국이라고 하기에는 부족한 점이 많다. 한국의 과학수사 수준을 올리려면 반드시 인력과 예산이 지원돼야 하고 과학수사 시스템과 교육제도, 데이터베이스를 보강해야 한다. 제대로 된 과학수사 시스템이 경찰 수백 명도 해결하지 못했던 사건을 단번에 해결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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