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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이야기/사건사고

[수원살인사건 그후] 13시간 후에 도착한 112, 8분 뒤에 출동했다가 욕먹은 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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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 경찰입니다. 말씀하세요."

"예. 여기 못골놀이터 전의 집인데요. 저 지금 성폭행당하고 있거든요."

 

차마 입에 올리기도 끔찍한 수원 20대 여성 살인사건의 녹취록을 읽고 있노라니 가슴이 미어진다. 눈물이 나온다. 아리따운 20대 아가씨가 무지막지한 폭력에 의해 납치되어 낯선 방에 홀로 갇혀 강간당하고 살해당할 위기에 처했을 때 아가씨가 느꼈을 공포를 생각하면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얼마나 무서웠을까.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하지만 절체절명의 그 순간에도 아가씨는 절망하지 않고 자신을 구해줄 '생명의 전화' 112를 기억해냈다. 그리고 서둘러 1.1.2 번호를 꾹꾹 눌렀다. 침착하고 용기 있는 행동이었다. 이윽고 전화기 신호음이 떨어지고 전화기 저쪽에서 "112경찰입니다. 말씀하세요"라는 말이 흘러 나왔을 때 아가씨는 안도했을 것이다. 정말로 안도했을 것이다. 아, 이제는 살았구나.

 

그러나 안타깝게도, 참으로 안타깝게도 아가씨는 살지 못했다. 죽었다. 아니, 그냥 죽은 게 아니고 너무나 참혹하게 살해되었다. 긴급전화를 받고도 13시간 만에 현장에 도착한 경찰은 목숨 걸고 생명의 전화를 걸었던 아가씨에게 아무런 힘이 되어주지 못했다. 바로 2012년 봄, 대한민국에서 벌어진 끔찍한 일이다.

 

비슷한 사건, 범인을 붙잡다

 



 

▲ 휴대폰으로 911에 도움을 요청한 여성의 강간범을 경찰이 신속하게 대응해 체포했다.

2012년 2월 12일 일요일 밤, 미국 플로리다주 코랄 스프링스에서는 강도 폭행 강간 사건이 발생했다. 범인은 개리 레나드 홈즈(19). 피해자는 출산한 지 1주일 밖에 안 된 25세 여성이었다. 범인은 피해자 집에 침입해 갖고 있던 칼로 여성을 위협하고 때리고 목조르고 강간을 했다. 하지만 피해 여성은 침착하게 기지를 발휘하여 갖고 있던 휴대폰으로 911을 눌렀다. 통화를 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피해자는 그냥 전화기만 열어둔 채 자신의 집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황을 경찰이 파악하여 범인을 붙잡게 되기를 기대했다.

 

경찰은 911 전화를 받은 뒤 전화를 걸어온 상대가 폭행을 당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피해자가 통화를 할 수 없는 위급한 상황이라는 것도. 경찰은 곧장 피해자 위치를 추적하기 시작했다. 휴대폰 전화는 집전화와는 달리 위치 추적이 쉽지 않았다. 하지만 경찰은 신속하게 전화를 건 곳과 가장 가까운 세 군데 기지국을 점검한 뒤 휴대폰 전화와 연결된 기지국을 알아냈다.

 

경찰은 피해자가 있는 곳의 정확한 주소는 몰랐지만 일단 피해자가 사는 곳 가까이 많은 경찰병력을 출동시켰다. 경찰이 현장 가까이 갔을 때 피해 여성은 다시 집전화를 이용하여 범인이 집을 빠져나갔다고 알려주었다. 경찰은 주변 일대 지역을 모두 차단한 뒤 결국 범인을 붙잡았다.

 

이 사건을 지휘한 커크랜드 경사는 TV 인터뷰에서 피해 여성을 칭찬했다.

 

"그런 위급한 상황에서 정신을 잃지 않고 911에 전화할 생각을 했다는 게 믿어지지 않아요."(*우리나라 피해 여성은 경찰과 통화까지 하고 위치도 알려주었는데 목숨을 잃었다.)

 

"미국이었음 전화 끊기 전에 경찰 도착했을 것"

 

이번 수원 20대 여성 살인사건이 발생한 뒤 미국의 한 여성 커뮤니티 사이트에는 한국 경찰의 늑장 대응을 꼬집는 분노의 글이 많이 올라왔다.

 

"들으셨죠? 수원 사건. 정말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힙니다. 울화가 치밀어서 소리 지르고 싶어요. 몇 년 전, 우리 아이가 잘못해서 911을 누른 적이 있었어요. 그때 제가 전화를 바꿔서 "아이가 실수로 한 거다. 아무 일 아니다"라고 해명을 했어요. 그런데도 5분쯤 있다가 경찰차 두 대가 와서 먼저 집 주위를 살피더니 저희 집 초인종을 눌러 확인하더군요. 제가 설명을 했는데도 경찰은 전화를 걸었던 아이를 보여달라고 해서 확인하고, 심지어 애한테 물어보고 그런 뒤에야 가더군요. 수원사건, 참 할 말이 없고 너무 화가 납니다."

 

"한국 경찰들 정말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무능하고 책임감 없네요. 미국에서도 설마 그런 일을 당해 911을 부르면 그렇게 쓸데 없는 질문 쏟아 부으면서 자기 일 아니라고 상관 안 하는 그런 일이 있을까요?"

 

이곳 게시판에는 미국에 사는 주부들이 겪은 911 경험담이 많이 올라왔다. 우리나라 경찰과 어떻게 다른지 비교해보라.

 

- 제 전화기 단축키가 911과 연결되어 있는데 아들이 그걸 잘못 눌렀어요. 바로 경찰이 들이닥치더군요. 제가 문을 늦게 여니까 거의 문을 부술 기세로 두드리더군요. 딱 2분 지나서 출동했는데 너무 놀랐어요. 그래도 미국 경찰 진짜 듬직해요. 저는 여러 번 그런 일을 당해서 잘 알아요. 한 번은 밤중에 길가에서 남편과 부부싸움을 했는데 순찰 돌던 경찰이 저를 따라와서 집까지 데려다 주고 남편이 폭력을 썼다면 바로 말하라고 하더군요. 남편에게도 폭력 행사했냐고 물어 우리 남편, 겁 잔뜩 먹었어요. 어쨌건 미국에 살면서 경찰 교육 하나는 잘 시켰구나 그런 생각이 들더군요. 그 놈의 총이 문제이긴 하지만... 그래도 확실히 내가 보호받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 911에 신고하고 주소 불러주고 상황 설명하고 있는데 바로 사이렌소리가 들리더라고요.

 

- 돌이 막 지난 아들이 열이 너무 심해서 경기를 일으켰어요. 아들은 바들바들 떨면서 우는데 제 심장이 다 쪼그라들고 머리가 터져 버리겠더라고요. 남편을 시켜 911에 전화했는데 1분도 채 안 되어 경찰이 왔어요. 경찰차, 소방차, 앰뷸런스까지. 집 근처에 있다가 바로 연락을 받고 왔다는데 미국에 살면서 저는 그때 믿음이 생겼어요.

 

- 제가 한 번 쓰러진 적이 있었어요. 혈압과 스트레스로. 아이가 대신 911을 눌렀는데 엄마 바꾸라고 해서 꼼짝 못한다고 말하고 집 주소를 댔는데 바로 왔습니다. 저는 공황장애 같은 증상을 보였고 남편도 서둘러 밖에서 달려왔는데... 하여튼 소방차까지 동원되고 앰뷸런스하고 차가 8대나 왔답니다. 저는 실려가느라 못 봤고요. 전화통화하면서 녹음이 되고 상황을 판단하는 듯합니다. 그리고 출동은 하면서 전화통화는 계속하고...

 

- 미국에 처음 도착한 날, 집을 못 구해서 호텔에 머물렀어요. 영어도 잘 못하고 호텔 룸전화로 한국에 전화 걸 줄도 몰라서 혼자 카드번호 누르다가 그만 실수로 911을 눌렀나 봐요. 저는 계속 통화 시도를 하다 실패해서 포기하고 누웠는데 누가 문을 두드려 나가보니 경찰이더군요. 무슨 일 있냐고 해서 안 되는 영어로 한국에 전화하려다 잘못 누른 것 같다고 미안하다고 하니 방까지 들어와서 화장실하고 방 구석구석 다 체크하고 나가면서 제 이름, 나이, 키 같은 거 묻더군요.

 

- 제 아이가 생사를 오갈 정도로 심하게 아파 911에 전화를 했는데 이것저것 묻기에 너무 다급한 나머지 끊어버리고 병원으로 직행했어요. 그런데 놀라운 것은 집 근처 병원이 이미 알고 있었다는 사실!

 

- 불과 3주 전, 아기가 갑자기 경기를 해서 911을 불렀는데요. 당시는 경기인 줄 몰랐어요. 아기 눈이 돌아가고 몸은 마치 물 밖 물고기처럼 파닥거리고. 아무튼 너무 놀라서 911에 전화했는데 5분도 채 안 된 것 같았어요. 911접수자는 911구조요원들이 올 때까지 계속 아기 상태를 물으며 사람들이 제게 도움을 주러 가고 있다고 계속 위로해 주었어요.

 

- 아마 수원사건과 똑같은 상황이었다면 그 전화 끊기도 전에 911 이미 도착해서 구급대원들이 그 전화를 껐을 거예요.

 

주소 한 줄 없이 일행을 찾아낸 미국 경찰

 



 

▲ 미국 경찰과 공권력은 막강하다. 시민의 안위를 위해 신속하게 대처하는 경찰은 가장 존경 받는 직업군에서 항상 상위에 뽑힌다.
ⓒ 한나영

112는 정말 어디서 걸려온 전화인지 몰랐을까.

 

신고자 : 예. 여기 못골놀이터 전의 집인데요.

접수자 : 못골놀이터요?

신고자 : 예. 못골놀이터 전의 집인데 어느 집인지 모르겠어요.

접수자 : 지동요?

신고자 : 예 지동초등학교 좀 지나서 못골놀이터 가는 길쯤으로요.

접수자 : 선생님 핸드폰으로 위치조회 한 번만 해볼게요.

신고자 : 네.

접수자 : 자세한 위치 모르겠어요?

접수자 : 여보세요. 주소 다시 한 번만 알려주세요.

 

피해 여성은 "지동초등학교에서 못골놀이터 가기 전"이라고 비교적 소상하게 자신의 위치를 알려주었다. 더구나 자신이 지금 성폭행당하고 있다는 말까지 했다. 이런 초비상 상황이라면 112에서는 위치를 추적해서 즉각 출동했어야 마땅하다(112에선 위치를 추적할 수 없다고는 하지만). 하지만 실망스럽게도 접수자는 신고자에게 자세한 위치를, 주소를 다시 불러달라고 하고 있다. 세상에.

 

이 대목에서 다시 미국 911을 들먹이는 걸 양해하시라. 나도 이와 비슷한 경험을 했으니까. 작년 1월, 우리 가족은 대서양이 보이는 버지니아비치에 가게 되었다. 집에서 4시간 정도 걸리는 거리다. 늦게 출발한 탓에 짧은 겨울 해가 금세 떨어지고 말았다. 길을 안내해주는 내비게이션만 믿고 갔는데 우리는 그만 좁은 골목길의 모래밭에 들어가게 되었다. 바퀴는 모래밭에 빠져 옴짝달싹 못하게 된 상황이었다. 어른 네 명이 나서서 버팀대를 놓고 밀어보기도 하고 액셀러레이터를 힘껏 밟기도 해보았지만 차는 꼼짝 안 했다. 우리는 완전히 고립되었다. 짭짤한 소금기와 출렁거리는 파도만이 우리가 바다 근처에 있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밤은 깊어가고 있었다. 휴대폰으로 911을 불렀다.

 

그 상황에서 911이 한국 경찰처럼 우리가 있는 곳의 위치를 묻는다면, 주소를 묻는다면 우리는 아무런 대답도 해줄 수 없을 것이다. 처음 와 본 낯선 곳이기 때문에. 물론 911도 우리에게 위치를 묻긴 했다. 하지만 모른다고 하니 그냥 기다리라고 했다. 곧 간다고. 그러면서 혹시 사고가 난 것은 아닌지, 다친 사람은 없는지 물었다.

 

전화를 끊고 몇 분 지나지 않아 칠흑같이 어두운 좁은 모래밭에 경찰차가 나타났다. 휴대폰 신호만으로 우리를 찾아온 것이다. 경찰은 차에서 내려 우리와 함께 차를 밀었다. 하지만 꼼짝도 하지 않자 견인 회사에 전화를 걸어줄 테니 기다리라고 했다. 잠시 뒤 견인차가 도착했고 우리는 모래밭에서 빠져 나올 수 있었다. 내가 경험한 911이다.

 

8분 뒤 출동했다고 욕 먹은 911

 

이처럼 신속한 대응은 시민의 안위를 위하는 경찰에 대한 높은 신뢰로 이어진다. 미국 경찰과 공권력은 누구도 함부로 할 수 없는 막강한 파워다. 미국에서 가장 존경 받는 직업에서 항상 상위에 뽑히는 직업이 바로 경찰관과 소방관이다. 시민의 안전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고 신속하게 위기 상황을 해결해주고 시민을 보호하는 모습에 높은 점수를 받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미국 911이라고 해서 늘 좋은 소리만 듣는 것은 아니다.

 

"911 접수자를 당장 해고하고 그 이름을 공개해라. 정말 짜증난다. 완전 루저! 가족들은 이 자를 직무유기로 고소하고 응분의 보상을 하도록 해라."

 

지난 2월, 유타주에서 끔찍한 일이 발생했다. 실종된 아내를 살해한 혐의를 받아온 남편(조시 파월)이 자신의 두 아들(7살, 5살)을 살해한 뒤 집에 휘발유를 붓고 불을 질렀다. 세 명 모두 사망했고 집은 완전히 소실되었다.

 

하지만 문제가 되었던 것은 911 전화를 받은 접수자였다. 당시 두 아들에 대한 감독방문을 수행 중인 사회복지사는 그 사건이 발생하기 몇 분 전, 파월 집 앞에서 911에 전화를 걸었다. 파월의 행동이 수상하다고. 법원의 감독방문 명령을 수행 중인 자신을 못 들어오게 하고 집안에서는 아이 울음소리가 들리고 기름 냄새까지 난다고.

 

하지만 전화를 받은 911 요원은 파월의 인종, 나이, 키, 머리색, 입고 있는 옷, 사회복지사 차색깔, 번호판 등 위기상황과는 상관이 없는 쓸데없는 질문을 퍼부으면서 시간을 지체했다. 결국 그 집은 경찰이 도착하기도 전에 화염에 휩싸여 폭발했다. 나중에 911 요원과 사회복지사의 대화내용과 녹취록이 공개되자 많은 사람들이 분노했다.

 

AP가 공개한 당시 911 통화 내역에 따르면 사회복지사는 낮 12시 8분에 911에 전화를 걸었다. 그 통화는 7분 동안 계속되었고 911은 통화종료 1분 뒤인 12시 16분에 출동했다. 현장에 911이 도착한 것은 낮 12시 30분. 14분이 걸렸다. 하지만 집은 이미 화염에 휩싸인 뒤였다.

 

사건 접수를 받고 '8분이나' 지난 뒤에야 911이 출동한 사실에 대해, 결국 끔찍한 사고를 막지 못한 데 대해 많은 미국인들은 분노했다(수원사건의 경우는 무려 13시간이 지난 뒤에야 현장에 도착했다). 당시 파월 사건을 접수했던 911 접수자는 NBC <데이트라인>에 출연하여 자신의 조처가 적절하지 못했음을 시인했다.

 

당신 누이라면, 딸이라면... 그렇게 했겠는가

 




▲ 
조현오 경찰청장이 9일 서울 미근동 경찰청에서 지난 1일 수원에서 발생한 20대 여성 살인사건 관련 유가족을 면담한 후 고개숙여 사죄하고 있다.



"미국에서는 여자가 그렇게 길거리에서 끌려 가는 거 보면 주위에서 다 전화 합니다. 911에. 집으로 끌려 들어가기 전에 경찰이 먼저 옵니다."

 

"10여 년 전, 운전 부주의로 혼자 갓길에 빠져 사고가 났는데요. 차에서 나와 신발이 없기에 차 안을 살펴보고 있는데 앰뷸런스와 소방차가 떼로 와 있더군요. 3분도 채 안 됐어요. 누가 신고를 해준 것 같아요."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정말 미안하고 송구스럽다. 피해 가족들에게도 깊은 위로의 말을 건넨다.

 

마지막으로 모두에게 묻고 싶다. 만약 그 여성이 당신 누이라면, 딸이라면, 아내라면 그렇게 대처했겠는가. 누군가에게 끌려가는 사람이 당신 누이라면 그렇게 나 몰라라 했겠는가. 112 접수자 역시 당신 누이가 "지금 성폭행당하고 있다"고 절박하게 말할 때 "지금 성폭행당하신다고요?, 누가 그러는 거예요?, 문은 어떻게 하고 들어갔어요?, 문 잠갔어요?, 들어갈 때 다시 한 번만 알려줄래요?"식으로 안이하게 대처했겠는가. 우리 사회의 부끄러운 자화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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