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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이야기/사건사고

사람사냥 그 인간성의 종말 밀라이 마을 학살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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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아침도 여느 아침과 다르지 않았다. 어둠을 밀어내며 해가 떠오를 때만 해도 찬 공기가 시원했다. 열대라지만 3월까진 아침저녁 선선한 바람이 불었다. 마을은, 갓난아이 칭얼거림이라도 들릴 듯 아늑하고 포근해 보였다. 그러나 그건 곧 깨질 평온이었다. 그래서 더 아름답게 보였는지 모른다. 귀청이 떨어지는 굉음과 함께 날아든 공격헬기 9대가 찰리(C)중대원들을 마을 입구에 내려주자 평소와 다름없었을 그날의 일상은 산산조각이 나버렸다.

 


 

 

벌건 태양 아래 자행된 '밀라이 마을' 학살극

 

'밀라이 사건' 어떻게 처리됐나
1999. 10. 2 [한겨레] 7면


 

군인들은…말 그대로 ‘지옥’을 몰고 왔다. 그들은 헬기에서 착지하자마자 후다닥 낮은 자세로 산개했다. 그리곤 M-16소총을 난사했다. 민가에 수류탄을 까 던지고 댓잎 지붕에 불을 질렀다. 놀란 사람들이 사방에서 튀어나올 때마다 개인화기가 불을 뿜었다. 울부짖고, 쓰러지고, “살려 달라” 애원하고… 살이 튀고 피가 쏟아지는 학살극이 벌건 태양 아래 자행됐다. 하지만 그런 잔혹도 이어 일어날 더 끔찍한 ‘계획살인’의 전주곡에 다름 아니었다.


1968년 3월 16일. 베트남 사이공(현 호치민 시) 동북방 140km 지점 ‘쾅가이’성 ‘송미’촌 ‘밀라이’마을. 그해 베트콩(vietcong-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의 설날대공세에 밀린 미군은 게릴라의 은거지를 타격해 실지를 회복할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특히 미 육군 11보병여단 1대대는 베트콩 수중에 들어간 밀라이 일대에 진격해 촌락을 초토화시킬 작전을 세우고 있었다. 대대장은 일찌감치 “거기 가서 확 쓸어버려!”라는 명령을 내렸다. 밀라이는 미군 사이에 ‘핑크 빌’(pink-ville, 빨갱이가 가득한 마을)로, ‘프리 파이어 존’(free-firing zone, 무차별 사격해도 되는 지역)으로 낙인찍혀 있었다.

 

진격선봉 찰리중대는 최근 대원 5명을 적의 부비트랩에 잃었다. 그래 적개심이 최고조에 달해 있었다. 밀라이 진입 전날 밤, 작전회의에서 중대장 어니스트 메디나 대위는 “과감, 과감, 과감하게 공격하라. 이 잡듯 철저히 수색하고 완벽하게 섬멸하라.”고 강조했다. 최선봉에 나설 1소대장 윌리엄 캘리 중위는 “겉보기엔 민간마을이지만 주민은 모두 적의 동조자, 내통자다. 남자는 무기를 지녔고, 여자는 배낭을 나르고, 아이들은 미래의 베트콩이다. 움직이는 것은 모두 처단하라”고 소대원을 다그쳤다.


캘리 중위는 그의 말과 한 치도 다름없이 행동했다. 그는 마을 민간인들이 전혀 항거하거나 적대행위를 하지 않았는데도 움직이는 물체만 보면 무조건 총을 갈겼다. 베트콩과 전투를 벌일 것으로 예상했던 병사들은 비무장 민간인에게 총을 쏘자 놀랐지만 소대장이 ‘솔선수범’하니 차츰 그를 따랐다. 훗날 한 병사는 이렇게 증언했다. “헬기가 논에 착륙하자 100야드 앞에 민간인 남녀 10여명이 걸어가는 게 보였다. 갑자기 한 병사가 M-16을 난사했고 곧 다른 병사가 M-79 수류탄발사포로 공격해 그들을 몰살시켰다”


밀라이 학살사건…월남전 회고록
1976. 3. 18 [동아일보] 5면

 

 

 

인간이 했다고 믿을 수 없는 민간인 대상 '잔혹 행위'

 

밀라이 사건 새불씨 "학살은 마약때문"
1970. 3. 26 [동아일보] 5면


아무도 대항하지 않는 한바탕 ‘전투’가 끝난 뒤 미군은 ‘포로’들을 한군데 집결시켰다. 대부분이 여자, 어린아이, 노인이었다. 남자들은 대부분 ‘교전 중’에 이미 사살됐다. ‘포로’수색과정에서 강간 추행 고문 등이 아무렇지도 않게 행해졌다. 몇 병사는 여자들 몸 일부를 전리품으로 잘라냈다. 임산부의 배를 가르고…인간으로선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을 벌였다. 이 역시 훗날 얘기지만, 미국 상원의원들은 그 짓을 마리화나 등 환각제의 탓으로 돌렸다. 맨 정신의 인간이 그런 짓을 했다곤 도저히 믿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다음은 더 충격적이다. 군인들은 민간인들을 여러 그룹으로 나눠 세우거나 꿇어앉힌 뒤 사격연습을 하듯 총을 쏘았다. 그 일은 마을 중앙이나 신작로 우물가 도랑 등에서 행해졌다. 한 병사의 증언은 쉬던 숨을 멈추게 한다. “누군가 45구경으로 아기를 조준해 쏘았지만 빗나가자 모두의 조롱을 받았다. 그는 서너 발자국 다가가 또 총을 쐈지만 역시 빗나갔다. 왁 웃음이 터졌고 그는 꼭지가 돌아 날뛰었다.” 아-이것이 정녕 인간이란 말인가.

 

 

 

아군의 잔혹행위를 말리려는 움직임도 있었지만..

 

물론 윌리엄 캘리와 그의 부하들이 미쳐 날뛰는 자리에도 인간은 있었다. 한 병사는 ‘포로’로 잡은 비무장 민간인에 대한 사격을 차마 할 수 없어 제 발에 총을 쏘았다. 그는 밀라이학살이 있던 그날 3월 16일, 찰리중대의 유일한 부상자였다. 또 있다. 수색정찰 헬기 조종사 휴 톰슨 준위였다. 뒤늦게 도착해 상공에서 학살현장을 본 그는 깜짝 놀라 사살 직전의 군인과 민간인들 사이에 헬기를 내렸다. 그때 그는 미군들의 눈이 야수의 그것처럼 번들거리는 것을 보았다. ‘포로’들은 그저 살려달라며 애절한 눈빛만 보내고 있었다.


톰슨이 외쳤다. “중위님, 도대체 여기서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겁니까?” 캘리는 못마땅한 듯, 비웃듯 대꾸했다. “난 지금 내가 해야 할 일을 하고 있을 뿐이야.” 톰슨은 거의 울먹이며 다시 항의했다. “제기랄, 저 사람들을 보세요. 민간인이란 말입니다. 총도 안 든 비무장 민간인이라고요!” 그러나 돌아온 대답은 차가웠다. “어이, 조종사. 이건 내 쇼야. 여긴 내 담당이라고, 그러니 날 내버려 둬. 넌 빌어먹을 네 헬기로 돌아가 네 일이나 해!!”


유일한 밀라이 작전 부상자
1969. 12. 3 [매일경제] 3면

 

톰슨은 헬기에서 내리기 전 자신의 기관총 사수 로렌스 콜번과 글렌 안드레오타에게 만약 보병들이 이상한 짓을 하면 쏘라는 지시를 내려놓은 참이었다. 헬기에서 사수들이 아군을 정 조준하고 있고 톰슨과 캘리의 보병대원들이 대치하는 기묘한 상황이 벌어졌다. 때마침 톰슨의 무전을 받았던 헬기 2대가 도착했고 그들은 부상한 민간인 10여명을 헬기에 태웠다. 제 발등을 쏜 중대의 유일한 부상자도 이때 헬기로 후송됐다. 공군들은 도랑 속 죽은 어머니 품속에 있던 두 살배기 아이도 찾아내 병원으로 보냈다.

 

 

 

'밀라위 사건' 진실은 밝혀지고..

 

"밀라이 촌 파괴 및 살인 명령"
1969. 11. 24 [경향신문] 3면


밀라이작전은 ‘성공리에’ 끝났다. 학살된 민간인은 최소 347명, 최대 504명으로 추정됐다. 비공식 자료에는 임산부 17명, 6세 미만 어린이 173명이 죽었다고 했다. 미군은 현장을 철저히 파괴했다. 민가에 불을 지르고 우물은 메워버렸다. “살아있는 건 병아리뿐”이라는 말이 나왔다. 톰슨과 안드레오타 는 보고서를 냈지만 군은 이를 묵살했다. 안드레오타는 며칠 후 석연치 않게 전사했고 톰슨은 아군을 해코지한 밀고자로 따돌림을 당했다. 오히려 그날 찰리중대는 “치열한 전투 끝에 적 128명을 사살하고 화기 4점을 노획했으며 아군 피해는 부상 1명뿐”이라고 보고해 부대표창을 받았다.


그러나 진실은 결국 햇빛을 보는 법이다. 그대로 묻힐 것만 같았던 그 사건은 근 2년이 지난 후 세상에 알려졌다. 베트남전 제대병으로 대학에 복교한 라이덴아워는 옛 찰리중대원을 만나 맥주를 마시다 그들이 무용담처럼 떠벌리는 밀라이 얘기를 듣고 치를 떨었다. 그는 들은 내용과 전쟁 중 자신이 보았던 민간인학살 사례 등을 적은 편지 30통을 닉슨대통령과 의회에 보냈다. 우여곡절 끝에 군은 진상조사를 벌였고 라이덴아워 고발내용이 사실에 가깝다는 것을 확인했다. 그러나 진실을 공개할 용기는 없었다.

 

군의 조사가 진행될 때 프리랜서 세이모어 허시 기자의 취재망에 걸렸다. 그는 두 달 동안 정밀 취재를 했다. 찰리중대원 명단을 입수해 한명 한명씩 만나 증언을 듣고 학살 현장의 사진도 일부 구했다. 움직일 수 없는, 전혀 저항하지 않는 비무장 민간인에 대한 학살행위가 틀림없었다. 사건 후 정확히 1년 8개월이 지난 69년 11월 17일 뉴욕타임스에 ‘밀라이학살’(Mylai massacre)이 보도됐다. 11월 30일엔 라이프지가 도랑에 나뒹구는 시체와 즉결처분하는 미군의 사진을 포함한 10페이지의 학살기사를 보도했다.

 

 

 

'베트남 양민학살' 전세계에 엄청난 충격파

 

엄청난 충격파가 일었다. “도대체 우리는 머나먼 동양의 전쟁터에서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거냐?”는 한탄이 쏟아졌고 반전여론이 핵폭풍처럼 미국을 덮쳤다. 학살의 주범으로 윌리엄 캘리 중위가 제대 하루 전에 전격 체포됐다. 또 당시 사단장 등 26명이 ‘계획살인’혐의로 기소됐다. 언론은 밀라이 외에도 미군의 잔학행위를 경쟁적으로 보도했다. “헬기에 태워가던 포로가 심문에 응하지 않자 상공에서 그대로 내던졌다”는 얘기며 “공격헬기들이 재미로 비무장 민간인에게 기총소사를 퍼부었다”는 보도가 넘쳐났다.


그러나 문제는 모두 반성만 하는 건 아니었다는 점이다. 미국 국회의원 일부가 “전쟁 중 일어난 불가피한 일을 언론이 국익도 생각하지 않으면서 무차별적으로 보도한다.”고 불만을 터트렸다. 윌리엄 캘리의 재판이 시작되기도 전에 그를 옹호하고 편드는 국가주의자들의 ‘캘리 전송가’가 나와 첫 주 음반 20만장이 팔렸다. “내 이름은 윌리엄 캘리, 나는 이 나라의 군인이다. 나는 자랑스럽게 내 임무를 수행했고…”로 시작하는 가사가 주요언론에 전문 게재되는가 하면 한 여론조사에선 캘리에게 죄를 물어선 안 된다는 의견이 79%나 나왔다.


'캘리 유죄'의 밀라이 사건이 던지는 문제성
1971. 4. 9 [동아일보] 5면

 

미군 '추악한 양민학살' 인정
1998. 3. 9 [한겨레] 11면


더 놀라운 것은 남베트남 정부의 반응이었다. 공식성명을 통해 “적성지역인 밀라이마을 일대에서 죽은 양민은 20명 정도며 계획된 살인행위가 아니라 포격으로 인한 불가피한 죽음이었다”며 “현지 주민들이 사망자를 300~600명으로 주장하는 것은 미국으로부터 보상금을 타내려는 잘못된 생각 때문”이라고 깔아뭉갰다. 그리고 “공산 측의 대민 교란용으로 이 사건이 왜곡 확대되고 있다”고 경고했다.


2년여의 재판 끝에 밀라이사건으로 유죄판결을 받은 것은 윌리엄 캘리 중위가 유일했다. 그는 22명을 살해한 혐의로 종신형을 선고 받고 가택 연금되었으나 바로 감형, 사면됐다. 그 외 장군, 장교들과 학살 가담 사병 등 기소된 모두가 무죄판결을 받았다. “국가를 위해 싸우다 불가피하게 벌어진 일”이라며 무죄, 사면을 요구하는 압력에 미국정부가 타협한 것이었다.

 

 

 

결국 사죄의 뜻을 표한 사건 주도자

 

반면 톰슨과 그의 사수 콜번은 군 생활 중 그 사건에 대해 입을 열지 말라는 압력을 받았다. 톰슨은 83년 제대했고 학살 30년째인 1998년 3월16일 밀라이를 방문해 그가 당시 민간인 구출공로로 받은 ‘영예 군인장’(soldier's medal)을 희생자 영전에 바쳤다. 그 덕분에 목숨을 건진 이들은 “톰슨에겐 너무나 고맙다. 그러나 그때 아무 저항도 하지 않는 내 가족을 몰살한 미군에 대한 증오심을 한시도 버린 적이 없다”고 했다.


사면 후 결혼도 하고 평범한 생활을 하는 듯 보였던 캘리는 2009년 8월 40년 만에 자신의 죄를 뉘우치며 사죄를 구했다. “그날 이후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은 날이 단 하루도 없었다. 목숨을 잃은 베트남인과 그 가족, 사건에 연루된 미군과 그 가족 모두에게 죄책감을 느낀다. 정말, 정말, 미안하다.” 억울하게 죽어간 500여명이 그 사과를 받아들였을까. 전쟁터라는 핑계 아래 드러난 광기, 인간성의 종말만 역사에 핏빛으로 기록된 건 아니었을까.


생존자·구출자 '감동의 재회'
1998. 3. 17 [경향신문] 7면

 

 

 

추기 1: 밀라이학살이 보도된 후 한국군도 그와 비슷한 행위를 했다는 보도가 끊이지 않았다. 당시 국방부는 이를 공산베트남의 악선전이며 교전수칙을 어긴 민간인 학살 등 잘못된 일은 일체 없었다고 주장하며 언론에 그 내용을 공식발표했다. 그러나 1966년 12월 6일 빈 호아사 꺼우 마을에서 131명을 살해한 것이 83년 외국 언론의 보도로 밝혀졌다. 근 35년이 지난 2001년 김대중 대통령이 베트남 방문 중 이를 사과했다. 이때 국내에서도 “그건 사과할 일이 아니다”는 반발이 일었다.


추기 2: 밀라이학살은 이후 전쟁영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 광기에 의한 집단학살을 자신의 참전 경험과 함께 엮은 올리버 스톤의 명작 ‘플래툰’이 대표적이다. 피에 굶주려 사람을 학살하고 피 잔치를 벌이는 뱀파이어 영화들도 밀라이학살에서 영감을 받은 것으로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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