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배에도 불구하고 빛났던 모드리치의 대분전
(사진=연합뉴스)
[풋볼리스트=그단스크(폴란드)] 서호정 기자= 예정된
유로2012 취재 일정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가기 하루 전 다시금 바르샤바에서 그단스크로 가는 기차에 몸을 실었다. 이번 유로2012 대회에서만
세 번째 방문이었다. 그단스크에서 모든 조별리그 일정을 치른 ‘무적함대’ 스페인의 경기를 모두 현장에서 지켜본 것은 행운이었다. 후일 역대
최고의 팀을 놓고 논쟁을 벌이게 될 것이 분명한 그들의 환상적인 플레이를 내 망막과 기억에 새겨둔다는 것은 두고두고 자랑거리가 될 일이었다.
이탈리아와의 명승부, 그리고 아일랜드를 상대로 한 대승. 이번에도 멋들어진 승리를 기대하며 그단스크에 도착했다. 하지만 경기장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승부의 전개는 예상과 달랐다. 오히려 내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디펜딩 챔피언에 도전한 크로아티아의 정열적인 플레이와 그것을 만들어 낸 한
작은 천재 미드필더의 분전이었다.
▲ 크로아티아가 2-2 무승부를 원한 이유
그단스크 중심가에서 볼 수 있었던 스페인과 크로아티아 팬들은
스쳐 지나갈 때마다 의외로 화기애애한 무드를 연출했다. 그들은 하나같이 모여서 “아리베데르치 이탈리아(굿바이, 이탈리아)”를 외쳐댔다. 그단스크
아레나에서 펼쳐진 경기는 조 1위 스페인과 조 2위 크로아티아의 대결이었다. 두 팀 다 1승 1무지만 골득실에서 스페인이 +4로 +2의
크로아티아에 앞서는 상황. 2무를 기록한 3위 이탈리아는 포즈난에서 탈락이 확정된 아일랜드와의 대결을 준비하고 있었다.
![]() 2-2 무승부면 이탈리아가 어떤 대승을 거둬도 스페인과 크로아티아가 8강에 올라갈 수 있었다 (사진=풋볼리스트) |
하지만 UEFA 주관대회는 다른 식으로 순위 결정이 적용된다. FIFA가 적용하는 승점->골득실->다득점 순으로 순위를 결정하는 것이 일반적으로 이해하는 부분이지만 UEFA는 승자승 규정을 중시한다. 승점 다음은 승자승에 의한 판별이다. 이 경우 크로아티아 팬들이 주장하는 2-2 무승부는 이탈리아가 아일랜드에 100-0으로 승리해도 스페인과 크로아티아를 8강에 올려주는 마법이자 절대조건이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스페인과 크로아티아가 비기고, 이탈리아가 아일랜드에 승리하면 세 팀은 모두 1승 2무로 동률이 된다. 이때 승자승은 세 팀의 아일랜드전 결과를 제외한 두 경기 결과로만 우열을 가린다. 상대전적이 2무승부로 같고, 무승부의 경우 자동으로 골득실이 0이기 때문에 다득점으로 넘어가게 된다. 이탈리아는 이미 스페인, 크로아티아와의 결과가 나온 상황이었다. 두 경기를 모두 1-1 무승부로 마친 이탈리아는 두 경기에서 2골을 기록한 상황. 이탈리아와의 경기만을 치른 스페인과 크로아티아의 상대전적에서의 다득점이 3골이 되면 이탈리아는 무조건 3위가 될 수 밖에 없었다. 이것이 승자승의 마법이고, 크로아티아가 2-2 무승부를 통해 8강에 동반 진출하자는 주장을 내세운 것. 스페인 팬들도 이런 결과가 썩 나쁘지 않은 표정이었다. 그러나 그건 팬들이 꿈꾸는 결과일 뿐, 정작 선수단의 입장을 달랐다. 어떤 결과도 장담할 수 없는 상황에서 당사자들에게 필요한 절대조건은 승리, 그리고 승점 3점이었다. 스페인이든, 크로아티아든 승리를 거두면 다른 팀이야 어쨌든 본인들은 확실히 8강으로 가는 상황이었다.
모드리치는 스페인의 화려한 미드필드진을 상대로 전혀 꿀리지 않은 기량을 선보였다
(사진=연합뉴스)
▲ 모드리치, 무적함대를 침몰 위기로
몰아넣다
크로아티아의 열혈남아, 슬라벤 빌리치 감독은 스페인전을 하루 앞두고 정면 승부를 선언했다. 언론과 팬들은 여러가지
경우의 수를 분석했고 2-2 무승부라는 양팀이 만족할 만한 조건을 내줬지만 빌리치 감독에겐 승리만이 가장 확실하고 믿을 수 있는 조건이었다.
그는 승리로 가기 위한 팀의 운명을 루카 모드리치에게 맡겼다. 앞선 두 경기에서 4-4-2 포메이션을 가동했던 빌리치 감독은 스페인전에는
4-2-3-1을 들고 나왔다. 투톱 중 옐라비치를 빼고 만주키치를 홀로 최전방에 내세웠고 4-4-2에서 깊게 배치되는 딥라잉 미드필더로 기용됐던
모드리치는 플레이메이커로 전진 배치되며 공격 전면에 나섰다. 사비 에르난데스, 안드레스 이니에스타, 다비스 실바, 사비 알론소, 세르히오
부스케츠. 이 시대를 대표하는 미드필더들이 집결해 있는 스페인 대표팀의 허리를 상대로 모드리치는 힘겨운 승부를 짊어져야 했다.
하지만 모드리치의 천재성도 만만치 않았다. 부코예비치와 라키티치 등을 이끈 모드리치는 허를 찌르는 패스와 안정감 있는 경기 운영, 순간적인 테크닉, 적극적인 수비 가담 등 미드필더로서의 모든 덕목을 보여주며 스페인 허리와 정면 승부를 펼쳤다. 모드리치의 적극적인 플레이와 날카로운 2선 공격에 사비 알론소와 부스케츠는 좀처럼 전진하지 못했다. 사비 에르난데스와 이니에스타, 실바가 전방에서 크로아티아 수비를 흔들었지만 뒤에서 올라오는 지원이 끊기자 그 위력은 반감됐다. 크로아티아 수비진은 토레스를 완벽히 봉쇄하고 박스 안에서 공간을 줄이는 조직적인 수비로 스페인의 공격을 막았다.
후반 12분에 나온 장면은 모드리치의 클래스를 압축시킨 명장면이었다. 빠른 드리블과 볼 터치로 스페인 수비 두 명을 순식간에 제치고 오른쪽 측면을 파고 든 모드리치는 감각적인 오른발 아웃프런트 킥으로 크로스를 올렸다. 순간 공격에 가담한 라키티치가 헤딩으로 연결했고 공을 빠르게 스페인 골문으로 날아들었다. 하지만 스페인의 골문에는 성자, 카시야스가 있었다. 골이라고 생각했던 그 장면에서 놀라운 반사신경으로 헤딩슛을 막아내며 자칫 침몰할 수 있었던 무적함대를 구했다. 모드리치는 이후에도 정확한 볼 배급으로 크로아티아의 위협적인 슈팅을 도왔다. 그러나 그 역시도 카시야스의 선방에 번번이 막히고 말았다. 천재 미드필더와 천재 골키퍼의 숨 막히는 대결이었다.
크로아티아와 모드리치의 꿈을 막은 카시야스 (사진=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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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유니폼이 더 어울린 마법사의 퇴장
후반 들어 팽팽한 대결을 펼친 양팀의 승부도 어느 새 종반을 향하고 있었다. 같은
시간 이탈리아는 안토니오 카사노의 골로 아일랜드에 1-0으로 앞서가고 있었다. 이 경우 승자승 원칙에 따라 골득실에서 앞서고도 이탈리아에 밀려
8강에 탈락하게 되는 크로아티아였다. 빌리치 감독은 이기겠다는 결단을 내렸고 후반 21분 두 장의 공격적인 교체카드를 던졌다. 오른쪽 풀백인
비다와 별 활약이 없던 왼쪽 날개 프라니치를 빼고 공격수 옐라비치와 윙어 페르시치를 투입했다. 골을 넣기 위해 안간힘이었다. 후반 36분에는
마지막 카드로 중앙 미드필더 부코예비치를 빼고 또 한명의 공격수 에두아르도를 투입, 닥치고 공격에 나섰다.
빌리치 감독의 공격적인 변화 속에 크로아티아는 스페인 문전으로 달려들며 골에 다가서는 듯 했다. 그러나 후반 43분 상황은 종결됐다. 크로아티아 수비라인이 바짝 올라간 것을 확인한 세스크 파브레가스가 감각적인 로빙 패스를 전방에 올렸고 순간적으로 이니에스타와 헤수스 나바스가 파고 들며 오프사이드 트랩을 무너트렸고. 완벽한 볼 트래핑으로 패스를 받아 유유히 골문으로 간 이니에스타는 득점 기회를 나바스에게 넘겼고, 나바스는 빈 골문에 강하게 공을 차 넣었다. 1-0. 크로아티아에겐 남은 시간 2골이 필요해지는 순간이었다. 나바스의 위치가 오프사이드였다는 크로아티아 선수들과 빌리치 감독의 강력한 항의가 있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결국 승부는 그대로 스페인의 1-0 승리로 끝났다. 같은 시간 이탈리아는 마리오 발로텔리의 추가골로 아일랜드에 2-0으로 승리했다. 동반 진출을 위한 경우의 수를 꿈꿨지만 정작 크로아티아에게 돌아온 결과는 조 3위, 그리고 탈락이었다. 이번 대회를 끝으로 크로아티아 대표팀에서 물러나는 빌리치 감독은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털어내고 비센테 델 보스케 감독에게 가 축하의 포옹을 했다. 그라운드에서는 모드리치와 이니에스타의 만남이 눈길을 끌었다. 누구라 할 것도 없이 서로에게 걸어간 두 선수는 각자의 유니폼을 벗어 교환했다. 이니에스타로부터 받은 스페인 유니폼을 걸치고 나가는 모드리치의 모습이 어색하지 않았던 것은 그가 할 수만 있다면 스페인 대표팀의 일원으로 뛰어도 전혀 손색 없는 기술과 감각, 패스를 지닌 세계의 몇 안 되는 미드필더였기 때문일 것이다.
올 여름에도 모드리치는 이적시장의 중심에 서 있을 것이 분명하다. 지난해 첼시로부터 강력한 러브콜을 받았지만 성사되지 못했던 모드리치는
벌써부터 레알 마드리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로의 이적설이 나돌고 있다. 작은 연못 안의 고래처럼, 자신이 지닌 거대한 창의력의 축구를 살려주기엔
2% 부족한 동료들과 소속팀에서, 대표팀에서 함께 하고 있는 모드리치에 이번 여름은 중요한 분기점이 될 것이다. 그는 세계 최강의 미드필드진을
보유한 스페인을 상대로 자신이 이 시대의 특별한 미드필더임을 다시 증명했다. 4년 뒤인 유로2016에서는 더 강한 대표팀 동료들과 함께 나타날
모드리치와의 만남을 기대하며 나의 유로2012 취재도 마감됐다.
![]() 스페인 유니폼을 입는다 해도 어색하지 않을 천재 미드필더는 자신의 유로2012를 마감했다 (사진=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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