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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관련/프로야구

랜디 존슨의 후계자는 누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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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 세일 ⓒ gettyimages/멀티비츠

레프티 그로브(1925-1941) 워렌 스판(1942-1965) 스티브 칼튼(1965-1988) 랜디 존슨(1988-2009). 여기에 불꽃을 태우고 사라진 샌디 코팩스(1955-1966)를 포함하면(이상 활동 시기) 메이저리그 역대 최고의 좌완 5명이 완성된다.

흥미로운 것은 그로브가 은퇴한 이듬해(1942)에 스판이 데뷔했으며, 스판이 은퇴하던 해(1965)에 칼튼이 데뷔했고, 다시 칼튼이 은퇴하던 해(1988)에 존슨이 데뷔했다는 것이다. 메이저리그 역사상 1900년 이후에 태어나 300승을 따낸 좌완은 이들 네 명과 톰 글래빈(1987-2008)뿐이다.

만약 그로브-스판-칼튼-존슨의 '바통 터치 계보'를 잇는 새로운 선수가 나타난다면, 그 주인공은 누가 될까. 2008년에 데뷔해 이미 지난해 트리플 크라운과 사이영상을 따낸 클레이튼 커쇼(24)나, 2009년에 데뷔해 2010년 샌프란시스코의 월드시리즈 우승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메디슨 범가너(22)는 그 후보로서 손색이 없는 선수들이다. 하지만 그 범위를 다시 '존슨 스타일의 후계자'로 좁힌다면, 일찌감치 네 가지 구종을 자유자재로 던지고 있는 커쇼나 '폭발적인 강속구'라고는 말 할 수 없는 범가너는 존슨의 스타일과는 거리가 멀다고 할 수 있다(2001년에 데뷔한 사바시아 역시 이 계보에는 들 수 없다).

이에 새로운 후보로 지목될 수 있는 두 명은 존슨이 은퇴한 이듬해인 2010년에 데뷔한 크리스 세일(23·화이트삭스)과 아롤디스 채프먼(24·신시내티)이다.

[mlb.com 영상] 세일의 15K 경기

세일은 화이트삭스가 2010년 전체 13순위로 뽑은 선수. BA는 드래프트 직전 세일을 브라이스 하퍼, 제임슨 타이욘, 매니 마차도에 이은 네 번째 유망주로 평가하며, 4순위 캔자스시티가 데려갈 것으로 예상됐다. 하지만 1-2-3순위 워싱턴-피츠버그-볼티모어에 차례대로 뽑힌 하퍼-타이욘-마차도와 달리, 세일의 지명 순위는 쭉쭉 미끄러졌는데, 세일이 '인버티드 W'로 알려진 위험한 투구폼과 함께 스카우트들이 대단히 꺼리는 젓가락 같은 체형(198cm 78kg)을 갖고 있기 때문이었다. 한편 캔자스시티는 4순위로 풀러튼대 유격수 크리스찬 콜론을 뽑았는데, 콜론은 현재 더블A에서 .286 .362 .406를 기록하고 있다.

세일을 데려간 팀은 13번째 지명권을 가진 화이트삭스였다. 화이트삭스는 빅리그 무대에 가장 빨리 오를 수 있는 선수를 원했는데, 그에 가장 걸맞는 선수는 바로 세일이었다. 세일은 싱글A 4경기와 트리플A 7경기에서 10.1이닝을 던진 후, 지명일에서 두 달이 되기도 전인 8월7일에 메이저리그 데뷔전을 치렀다.

2010-2011년 두 시즌 동안 화이트삭스의 불펜에서 뛰어난 활약을 한 세일은 추신수를 상대로 8타수 무안타 1볼넷 5삼진을 기록 중인 '추신수 킬러'이기도 하다. 아지 기엔 감독이 화이트삭스 시절 '팬과의 만남' 행사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어느날 추신수는 경기 전 기엔 감독에게 "왜 경기 후반만 되면 저를 상대로 항상 맷 손튼을 올리시나요?"라며 농담을 건넸다. 바로 그 날 기엔은 추신수를 상대로 손튼 대신 세일을 올렸다. 손튼보다 더 큰 악몽이 시작된 날이었다. 얼마 후 추신수는 다시 기엔 감독을 찾아가 이렇게 말했다고 "저기 다시 손튼으로 바꿔주시면 안 될까요?" 강력한 패스트볼-슬라이더 조합과 함께 공이 뿌려지는 시점을 알기 힘든 세일은 추신수뿐 아니라 모든 좌타자들의 악몽이다.

2007년 콜로라도의 21라운드 지명을 거부한 세일은 대학에 진학할 때까지만 해도 강력한 패스트볼을 가지고 있지 못했다. 하지만 1학년 시즌 후 코치의 조언에 따라  팔 각도를 '낮은 스리쿼터'(low three-quarter)로 내리면서 패스트볼 구속이 평균 91마일, 최대 94마일로 급상승하기 시작했으며, 무브먼트 역시 크게 좋아졌다. 이후 세일은 드류 포머랜츠(5순위 클리블랜드 지명, 현 콜로라도)와 함께 2010년 드래프트에 나올 대학 좌완 2인방으로 활약했다.

랜디 존슨(207cm 102kg)을 연상시키는 깡마른 몸(198cm 82kg)과 사이드암에 가까운 딜리버리, 강력한 패스트볼과 슬라이더는 존슨의 후계자로 전혀 손색이 없는 조건들이다. 하지만 세일은 이 때문에 드래프트 지명 순위에서도 밀렸고, 데뷔 후 첫 2년간 불펜투수로 뛰어야 했다.

'인버티드 W' ⓒ gettyimages/멀티비츠

2002년부터 화이트삭스를 맡고 있으며 현역 최고의 투수코치 중 한 명으로 꼽히고 있는 돈 쿠퍼는 이론 연구를 많이 하는 코치로 알려져 있다(화이트삭스가 2005년 월드시리즈를 우승한 후 양키스는 쿠퍼를 데려가려고 했는데 화이트삭스는 인터뷰를 허락해주지 않았다). 쿠퍼는 '인버티드 W'의 위험성에도 동의를 하고 있는데, 이 때문에 스티븐 스트라스버그가 등장했을 때 '곧 탈이 날 수도 있다'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이는 결국 적중했다). 그런 쿠퍼의 의견에 따라 아지 기엔 감독도 세일을 불펜에 둘 것을 고집했다. 하지만 기엔 감독이 떠나면서 켄 윌리엄스 단장은 마침내 자신의 뜻을 이룰 수 있었다.

[관련 기사] 스트라스버그 투구폼, 무엇이 문제인가

선발로 전환한 후 첫 10경기에서 세일이 보여준 모습은 놀랍기만 하다. 4일(이하 한국시간) 시애틀전에서 2실점 완투승을 따낸 세일은(7승2패 2.30), 다승과 평균자책점에서 리그 1위, WHIP(0.98)과 피안타율(.193) 승률(.778) 9이닝당 탈삼진(9.52)에서 리그 4위에 오르는 기염을 토하고 있다.

특히 세일은 5월에만 4승1패 1.71을 기록하고 4월 제이크 피비에 이어 AL 5월의 투수로 선정됐는데, 29일 탬파베이전에서는 15개의 삼진을 기록함으로써, 아메리칸리그에서는 1987년 그렉 스윈들 이후 25년 만에, 메이저리그에서는 1998년 케리 우드 이후 처음으로, 첫 선발 10경기 내에 15K 경기를 만들어낸 투수가 됐다(우드는 5번째 등판에서 20K 달성). 또한 23세59일의 나이는 2003년 마크 프라이어(22세292일) 이후 최연소 15K 기록이었으며, 잭 하시먼이 1954년 기록한 16K 팀 역대 최고 기록에 1개 모자란 것이었다.

세일이 같은 나이의 존슨보다 더 앞서 있는 것은 이미 뛰어난 체인지업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프로에 입단할 때 세일의 세컨드 피치는 슬라이더가 아닌 체인지업이었다. 덕분에 세일은 좌타자(통산 .216 1피홈런) 만큼이나 우타자(통산 .188 10피홈런)도 확실하게 잡아내고 있다. 물론 '선발투수 세일'은 존슨 만큼의 강속구는 던질 수 없다. 하지만 고무적인 것은 선발 전환으로 인해 떨어진 구속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위력적이라는 것이다.

2010 : 96.3마일 / ERA 1.93 / WHIP 1.07 / AVG .185 / 12.3삼진
2011 : 95.3마일 / ERA 2.79 / WHIP 1.11 / AVG .203 / 10.0삼진 
2012 : 92.2마일 / ERA 2.34 / WHIP 1.01 / AVG .198 / 9.52삼진

관건은 세일이 대단히 위험한 투구폼을 가진 선발투수라는 것이다. 그가 가벼운 팔꿈치 통증을 호소하자 구단이 곧바로 마무리 전환을 발표를 했다가 한 경기 만에 취소를 했던 해프닝은 화이트삭스가 세일의 부상 위험성에 대해 얼마나 신경을 쓰고 있는지를 알려준 것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흉내조차 낼 수 없는 매커니즘으로 롱런을 했던 존슨과 같은 강인한 신체가 그에게 있지 한, 세일은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불펜으로 돌아가게 될지도 모른다. 

아롤디스 채프먼 ⓒ gettyimages/멀티비츠

2010년 1월 신시내티가 보스턴 에인절스 플로리다 토론토 등을 제치고 스트라스버그(4년 1510만)보다 더 큰 규모의 계약(6년 3025만)으로 채프먼을 잡을 때까지만 해도, 많은 사람들이 신시내티가 위험한 선택을 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올시즌이 시작되기 전까지만 해도, 그러한 우려는 현실이 되는 듯했다. 2010시즌 후 채프먼을 당장 선발로 쓰는 것을 포기한 신시내티는, 지난해 그를 불펜으로 보냈다. 하지만 채프먼은 4경기 1.1이닝 12볼넷(2안타 1몸맞는공) 10실점의 대참사를 포함해 9이닝당 7.38개라는 터무니없는 볼넷 허용율을 기록하고 시즌을 끝냈다. 결국 신시내티와 채프먼은 구속을 낮추기로 했다. 많은 파이어볼러들이 제구를 위해 구속을 떨어뜨리지만, 성공하는 경우는 많지 않다. 하지만 신시내티의 모험은 현재 대성공으로 이어지고 있다.

2010년 : 99.6마일(160.3km)
2011년 : 97.9마일(157.6km)
2012년 : 96.7마일(155.6km)

2010년 : ERA 2.03 / WHIP 1.05 / AVG .196 / 3.4볼넷 12.8삼진 (3.80)
2011년 : ERA 3.60 / WHIP 1.30 / AVG .147 / 7.4볼넷 12.8삼진 (1.73)
2012년 : ERA 0.00 / WHIP 0.57 / AVG .076 / 2.9볼넷 16.1삼진 (5.56)

2010년에 비하면, 올해 채프먼의 패스트볼 평균 구속은 3마일 가까이 떨어진 상황이다. 하지만 원래 구속이 워낙 빠르다 보니 낮춘 구속으로도 충분히 타자들을 압도하고 있다. '제구 향상'이라는 원래의 목적 역시 이뤄, 9이닝당 볼넷수를 지난해보다 5개 가까이 떨어뜨렸으며 '제구된 파이어볼'이 들어오다 보니 오히려 더 많은 삼진을 쓸어담고 있다(탈삼진/볼넷 비율 5.56).

4일 현재 채프먼은 시즌 개막 후 23경기 28이닝 무자책을 이어가고 있는 중. 이미 1999년 존 휴덱이 세웠던 18경기 팀 기록을 경신했으며, 셋업맨보다 중압감이 더 큰 마무리를 맡은 후에도 6경기에서 1승 5세이브/0블론 무실점(6.2이닝 무피안타 2볼넷 12삼진)이라는 완벽한 피칭을 이어가고 있다. 채프먼이 시즌 개막 후 두 달이 지나는 동안 유일하게 내준 실점은 5월18일 메츠전에서 있었는데, 이는 실책으로 비롯된 무사 만루에서 희생플라이로 내준 비자책점으로, 채프먼은 계속된 1사 1,3루에서 삼진 두 개를 잡아내고 더 이상 실점하지 않았다. 그 이후 채프먼은 19.1이닝 무실점을 계속 이어가고 있다.

또한 채프먼은 2K 이상을 기록한 17경기를 포함해 올시즌 23경기 모두에서 최소 1개 이상의 삼진을 잡아내고 있는데, 이에 명예의 전당 마무리 브루스 수터가 1977년에 기록한 39경기 메이저리그 최고 기록을 경신할 수 있을지에 주목된다. 당시 수터는 2이닝 이상도 많이 던진 '멀티 이닝 마무리'였기 때문에 이 기록을 이어가기가 채프먼보다는 한결 유리했다.

[mlb.com 영상] 채프먼의 무시무시한 구위

세일의 관건이 부상이라면 채프먼의 관건은 아직 선발로서는 아무런 모습도 보이지 못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마무리로서 성공적인 시즌을 보낼 수 있다면, 내년에는 존슨 이후 가장 강력한 투피치 선발투수를 보게 될지도 모른다(신시내티가 채프먼을 마무리에 계속 둘 가능성은 높지 않다). 세일이 존슨을 연상시키는 투구폼과 키를 가지고 있다면, 채프먼은 존슨의 레퍼토리에 대한 향수(폭발적인 강속구를 가진 투피치 좌완)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다.

물론 세일은 선발투수로서 이제 첫 걸음을 내딛였을 뿐이며, 채프먼은 아직 걸음마도 떼기 전인 상태다. 하지만 충분한 잠재력을 가진 두 '닮은꼴'의 등장은, 존슨의 속 시원했던 피칭이 갈수록 그리워지고 있는 우리에게  그의 과거를 잊지 않도록 해주는 '토템'이 되어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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