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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관련/프로축구

우아함을 찾은 토레스, 돌아온 진짜 9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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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우가 광장을 점거한 아일랜드 응원단 (사진=풋볼리스트)

[풋볼리스트=그단스크(폴란드)] 서호정 기자= 나흘 만에 다시 찾은 그단스크는 중앙역부터 온통 녹색 천지였다. 이전 경기만 해도 스페인 팬들이 이탈리아 팬들을 수에서 압도하는 모습이 펼쳐졌던 그단스크였지만 아일랜드 팬들이 등장하자 전세는 뒤바뀌었다. 거리를 걸을수록 점점 불어나 결국은 거리를 가득 메운 아일랜드 팬들의 규모는 경이로울 정도였다.

이번 유로2012에서 1승을 챙길 유일한 기회였던 크로아티아와의 경기에서 1-3으로 완패했지만 아일랜드 응원단은 아랑곳하지 않고 조별리그 2라운드가 펼쳐지는 그단스크로 넘어왔다. 녹색의 유니폼과 주황색의 가발, 한 손에는 머플러를, 한 손에는 맥주를 든 그들은 전투 준비를 끝낸 상태였다. 그단스크를 방문하는 이들이라면 누구나 들리는 드우가 광장 주변의 카페와 레스토랑의 종업원들은 하나같이 “노 비어(No beer)”를 외쳤다. 아일랜드 팬들이 그단스크 시내의 맥주를 몽땅 마시며 벌어진 사태였다.

소란스럽기로 소문난 스페인 팬들마저도 침묵하게 만들었지만 그단스크 아레나의 그라운드만큼은 아일랜드 팬들이 정복할 수 없었다. 이탈리아와의 경기에서 명승부를 펼치며 예열을 끝낸 스페인 대표팀은 이날 최고의 경기력을 자랑하며 승리했다.

 

 

델 보스케 감독은 제로톱이 아닌, 토레스를 세운 전형적인 축구로 회귀했다

▲ 가짜 9번을 버리고 진짜 9번을 가동하다
경기 1시간 전 선발라인업과 포메이션이 그려진 인쇄물이 쏟아지자 미디어센터는 술렁이기 시작했다. 스페인 대표팀의 최전방에 선 것은 페르난도 토레스였다. 스페인 기자들은 모두 “속았다”며 웃거나, 화를 내기 시작했다. 비센테 델 보스케 감독은 이탈리아전이 끝난 뒤부터 아일랜드전을 앞두기까지 인터뷰에서 한결 같이 “제로톱을 고수하겠다”는 입장을 보였다. 델 보스케 감독은 이탈리아와의 조별리그 첫 경기에 스트라이커가 없는 선발 라인업을 내세웠다. 미드필더인 파브레가스를 최전방에 세우는 4-6-0 포메이션이었다. 파브레가스는 바르셀로나의 메시, 로마의 토티처럼 ‘가짜 9번(False 9)’으로 기용됐고 동점골을 터트리며 자신의 역할을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하지만 아일랜드전에는 진짜 9번이 등장했다. 토레스는 스페인 대표팀의 9번이다. 이탈리아전에서 움직임은 좋았지만 자신이 만든 찬스에서 결정을 짓지 못했던 토레스로선 중요한 시험대였다. 델 보스케 감독은 아일랜드의 수비진을 전형적인 전술로 깨트리려 했다. 변화는 또 있었다. 챠비 에르난데스를 보다 전진 배치, 처진 공격수에 가까운 위치에 세웠다. 자신의 뒤에 사비 알론소와 세르히오 부스케츠가 포진됨에 따라 챠비는 수비에 대한 부담은 거의 받지 않고 공격적인 움직임과 예의 날카로운 패스를 구사할 수 있게 됐다.

경기 시작 휘슬이 울린 뒤 스페인의 전형은 표면적으론 4-3-3으로 보였지만 실제론 4-2-3-1이었다. 토레스는 아일랜드 수비진 배후를 쉴 새 없이 파고 들었고 그의 뒤에서는 챠비를 비롯해 안드레스 이니에스타, 다비드 실바 등 세계 최강의 2선 공격진이 다양한 공격 루트로 보조했다. 결국 전반 4분 만에 스페인은 첫 골을 터트렸다. 기대했던 토레스의 득점이었다. 이니에스타의 날카로운 패스를 실바가 받기 위해 달려드는 것을 아일랜드의 리차드 던이 태클로 저지했다. 던이 뒤돌아 선 사이 토레스는 재빨리 달려들어 공을 가로 챘고 페널티 박스 안에서 군더더기 없는 움직임과 한 차례 치고 나가는 페인팅으로 기회를 만든 뒤 강력한 슈팅으로 직접 해결했다.

특유의 우아한 움직임으로 수비 뒷공간을 흔들며 두 골을 터트린 토레스 (사진=연합뉴스)

▲ 돌아온 토레스, 우아한 원톱의 재림
첫 골 이후에도 토레스는 기세를 멈추지 않았다. 비가 내려 적당히 미끄러워진 그단스크 아레나의 그라운드에서 그는 완벽한 변속기어를 지닌 스포츠카처럼 방향전환을 해대며 아일랜드 수비진을 휘저었다. 리차드 던과 션 세인트-레저의 중앙수비는 토레스의 침투를 막기에 스피드도, 유연함도 부족했다. 토레스의 움직임에 맞춰 완벽한 타이밍에 들어오는 챠비와 이니에스타의 패스가 두려워 아일랜드 수비가 라인을 뒤로 내리면 사비 알론소가 중거리 슈팅을 쏴댔다. 올릴 수도 내릴 수도 없는 아일랜드 수비는 전반 내내 우왕좌왕했다.

후반 4분, 골키퍼 셰이 기븐의 펀칭 미스로 인한 찬스에서 다비드 실바가 너무나 여유롭게 추가골을 터트리자 전세를 확실히 스페인으로 넘어갔다. 그리고 후반 25분 토레스가 아일랜드를 절망의 나락으로 빠트렸다. 다비드 실바의 전진패스에 맞춰 수비라인을 따돌리고 들어간 토레스는 기븐과의 1대1 찬스에서 속도감이 붙었음에도 침착한 마무리로 팀의 세 번째 골을 터트렸다. 리버풀 시절 곧잘 보여준 원톱으로서의 우아한 움직임은 두 번의 골 장면 외에도 여러 차례 확인할 수 있었다. 두 골로 자신감을 되찾은 토레스는 4분 뒤 파브레가스와 교체돼 나갔다. 델 보스케 감독은 이미 경고가 한 장 있는 토레스의 카드 관리까지 해주는 여유를 보였다.

토레스가 나오고 파브레가스가 투입되면서 스페인은 다시 제로톱 전술을 구사했다. 앞서 사비 알론소를 대신해 들어간 하비 마르티네스가 공격형 미드필더로 파브레가스 뒤를 받쳤고 챠비는 뒤로 내려가 부스케츠와 미드필드 후방을 맡았다. 그리고 후반 38분 코너킥 상황에서 공을 건네 받은 파브레가스는 수비수 한 명을 제치고 강력한 슈팅으로 팀의 네 번째 득점을 맡았다. 일급 스트라이커 수준의 움직임과 마무리였다. 두 경기 연속 득점에 성공한 파브레가스는 델 보스케 감독이 제로톱에 대해 자신감을 보이는 확실한 이유이자 증거였다. 무적함대는 경기 중 자신들이 지닌 두개의 공격 옵션을 차례로 시험했다. 이탈리아처럼 조직적이고 두터운 수비블록을 형성해 나오는 팀에겐 제로톱을, 그렇지 않은 팀에겐 오소독스한 플레이를 펼칠 수 있는 토레스를 투입해 상황에 따라 다른 축구를 구사할 수 있는 플랜 A, B를 모두 갖췄음을 보여줬다.

그단스크 아레나를 녹색으로 물들인 아일랜드 응원단 (사진=풋볼리스트)

▲ 스페인 축구보다 빛난 아일랜드 응원단의 열정
아일랜드는 축구 그 자체로만 보면 스페인과 정반대였다. 지극히 전통적인 4-4-2 포메이션을 들고 나온 그들은 측면 돌파와 롱볼에 의존한 공격을 펼치다 처참한 패배로 경기를 마쳤다. 볼 점유율 66대 34. 슈팅 수 26대 6(유효슈팅 20대 4). 패스 성공률은 56%(397회 시도, 224회 성공)로 84%(929회 시도, 779회 성공)의 스페인과 비교도 되지 않았다. 그들에겐 이니에스타와 실바 같은 창의적인 테크니션고, 챠비와 사비 같은 묵직한 존재감의 중원 사령관도 없었다. 투박하고 직선적인 팀 컬러로 안되는 걸 알면서도 계란에 바위치기 하듯 무모한 도전을 했다.

10년 전만 해도 아일랜드는 2002 한일월드컵 16강전에서 스페인을 승부차기로 몰고 갔을 정도로 끈끈하고 투지가 넘쳤다. 하지만 10년 사이 스페인은 너무 강해졌고, 아일랜드는 오히려 자신들의 무기를 차례로 잃어버린 상태였다. 그 결과가 0-4 완패였다. 든든한 파트너가 없는 로비 킨은 라모스의 맨마크에 막혀 두 개의 슈팅을 날리는 데 그쳤다. 이날 아일랜드 선수 중 가장 바빴던 것은 골키퍼 셰이 기븐이었다. 선방 연습을 하듯 부지런히 상대 슈팅을 막았지만 네 골이나 내줬다.

아일랜드의 부진은 어느 정도 예견됐던 부분이다. 그들에게 유로2012는 24년 만의 유럽선수권이다. 플레이오프에서 에스토니아를 만나는 행운 덕에 얻은 본선행 티켓이었다. 현 대표팀 멤버 중 유럽선수권 경험이 있는 선수가 한 명도 없는 유이한 팀이다. 처녀출전인 우크라이나가 아일랜드와 같은 신세다. 반면 스페인은 1960년 원년대회부터 유럽선수권 전 대회를 참가한 디펜딩 챔피언이었다.

전력의 격차는 분명했지만 팬들의 열정만은 스페인에 지지 않았다. 오히려 응원전은 스페인을 압도했다. 개최국인지 착각할 정도로 경기장 좌석을 가득 메운 녹색의 아일랜드 응원단은 경기 내내 자신들을 대표하는 선수들이 자부심을 잃지 않게 큰 소리를 보냈다. 이미 패색이 짙어졌고 2패로 조별리그 탈락이 눈 앞에 왔지만 기죽지 않았다. 적극적인 수비로 아일랜드 선수가 공이라도 한번 뺏으면 골을 넣은 것마냥 우레와 같은 함성과 박수를 보냈다. 유망주 제임스 맥클린이 들어갈 때도 큰 박수로 격려했다.

대패 속에도 사그러들지 않은 아일랜드 팬들의 열정은 스페인의 화려한 축구 이상으로 빛났다 (사진=연합뉴스)

경기 종료 10분 전부터는 아일랜드의 대표적 노래인 'Fields of Athenry(아턴리의 들판)'를 부르기 시작했다. 19세기 아일랜드 대기근의 아픔을 담은 아턴리의 들판은 그들의 정신과 영혼을 깨우는 곡이다. 패배가 이미 확정된 그 시간에 아일랜드 선수들의 집중력과 의욕이 가장 돋보였던 것도 그 때문이다. 경기가 끝나고도 한참 동안 그단스크 아레나에 울려 퍼진 노래였다.

적어도 이날만큼은 토레스가 아닌 아일랜드 응원단이 경기 MVP였다. 그들의 대표팀은 이번 대회 최악의 경기력을 가졌을지 몰라도 응원하는 팬들만큼은 최고였다. 0-4라는 스코어가 열정만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처참한 현실을 알려졌지만 24년 만에 유럽선수권 무대에 오른 그 자체가 아일랜드에게는 즐겨야 하는 순간이었다. 경기가 끝나고 한참 뒤에도 자신들을 향한 노래를 멈추지 않는 팬들 앞에 선 아일랜드 선수들은 쉽게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들의 눈에는 전의가 살아 있었다. 탈락이 확정됐지만 그들에게 남은 이탈리아전은 자신들을 응원하는 팬과 국민들을 위해 최선을 다할 수 밖에 없는 경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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