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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관련/프로축구

‘보급형 히딩크’, 그 이상을 꿈꾸는 아드보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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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샤바 국립경기장을 둘러싼 경찰병력들, 폴란드와 러시아의 대결은 말 그대로 전쟁이었다 (사진=연합뉴스)

[풋볼리스트=바르샤바(폴란드)] 서호정 기자= 바르샤바 도심의 중앙역 바로 옆에는 폴란드의 수도를 대표하는 건축물 문화과학대궁전이 우뚝 솟아 있다. 바르샤바에서 가장 화려하고 높은, 도시 어디에서나 바라볼 수 있지만 문화과학대궁전은 가이드 북에서 대표적인 관광지로 소개되진 않는다. 오히려 바르샤바 시민들을 비롯한 폴란드 국민들이 가장 저주하는 건축물이다. 바로 스탈린 통치 시절 폴란드를 점령한 소련이 남기고 간 치욕스러운 역사의 증거이기 때문이다. 그 건축물 옆에 선 팬존에서는 유럽의 대표적인 원수, 폴란드와 러시아가 만났다. 8강 진출의 희망을 살려야 하는 폴란드와 조기 확정을 꿈꾸는 러시아의 유로2012 A조 2라운드 경기였다.

▲ 전운이 감돈 바르샤바, 결국 터진 폭력사태
폴란드인들에게 ‘가장 싫어하는 인물이 누구냐’고 묻는다면 답은 백에 백 이렇게 돌아온다. 2차세계대전을 일으키고 아유슈비츠 수용소를 만들어 폴란드를 죽음의 땅으로 만들었던 히틀러, 그 다음은 폴란드를 강제 통치하며 공산위성국가로 전락시킨 스탈린이다. 싫어하는 나라를 물어도 같은 대답이다. 나치 독일, 그리고 소련이다. 지금의 독일과 러시아다. 그런 폴란드가 개최하는 유로2012에 러시아가 같은 조에 속하며 경기를 치러야 한다는 사실은 다시 한번 역사적 배경을 되살아나게 했다.

12일 바르샤바에는 폴란드와 러시아 팬들의 충돌 사태가 곳곳에서 벌어졌다 (사진=연합뉴스)

러시아에 대한 폴란드의 감정은 증오와 불신이다. 18세기 왕위계승에 개입하며 전쟁을 일으킨 러시아는 폴란드를 늘 괴롭혀왔다. 20세기에 들어선 2차대전의 시발점이 된 폴란드 침공으로 양국 간 감정은 극도로 악화됐다. 2차대전 동안 폴란드는 독일과 소련에 의해 분할 점령됐고 전쟁이 끝난 후에도 소련 점령 하에 있었다.

수백년간 계속된 러시아의 슬라브 민족에 대한 억압의 굴레는 21세기 들어서도 끊어지지 않고 있다. 최근엔 레흐 카친스키 대통령이 탄 항공기가 러시아에서 추락, 대통령 부부를 비롯한 탑승객 전원이 사망하며 폴란드 국민들의 의구심이 급증했다. 추락사고 자체가 러시아가 감행한 일이라는 음모론이 확산됐고 이를 부인한 푸틴 러시아 대통령에 대한 극렬 비난이 일었다. 바르샤바 시내에선 비행기 추락사고를 재조사해야 한다는 집회가 열리고 있었다.

한일전 이상의 감정이 담긴 두팀의 경기를 앞두고 폴란드 당국은 촉각을 곤두세웠다. 경찰 병력을 몇 배나 증강해 경기장 주변에 배치했고 만일의 상황 시 고무총과 물대포의 사용을 허가했다. 경찰견들도 준비됐다. 이날만큼은 유로 2012가 축제가 아닌 전쟁이었다. 도심 곳곳에서는 폴란드 팬들과 러시아 팬들이 세를 과시했다. 끝내 양국 팬들은 경기 시작되기 전 이미 한 차례 패싸움을 벌였다. 경찰 진압 끝에 40여명의 넘는 인원이 체포됐다. 경기 후에도 곳곳에서 크고 작은 다툼이 벌어졌다. 이번 대회를 앞두고 개최국 내의 인종차별에 대한 우려가 컸지만 정작 문제는 유럽 내의 오랜 국가 간 감정에서 터졌다.

경기가 열린 바르샤바 국립경기장 내에는 5만 5천여 관중이 들어섰다. 1만명이 넘는 러시아 관중들이 자리를 잡았고 그 주변으로 폴란드 관중들이 압박했다. 경기 시작 전 양국 국가가 차례로 울려 퍼지고 러시아 관중들이 1, 2층을 가리는 초대형 통천을 펼치자 4만여 폴란드 팬들은 ‘’폴스카’를 외치며 거대한 함성으로 적군의 응원을 덮어버렸다. 이날 경기의 심판진이 볼프강 스타크 주심을 비롯한 독일 출신이라는 것도 아이러니였다.

대회 도움과 득점에서 각각 1위를 달리고 있는 아르샤빈과 자고예프 (사진=연합뉴스)

▲ 돌아온 별 아르샤빈과 떠오르는 별 자고예프
개전 초반의 분위기는 폴란드가 잡아 나갔다. 최전방에 선 믿음직한 스트라이커 레반도프스키를 필두로, 브와슈치코프스키와 오브라니악, 무라프스키의 2선 공격은 러시아 문전에 위협을 가했다. 전반 6분에는 오브라니악의 프리킥에 이은 보에니쉬의 헤딩이 골로 이어지는 듯 했으나 이미 균형을 잃은 골키퍼 말라페프의 디딤발을 맞고 나오는 불운을 맞았다. 레반도프스키와 무라프스키, 폴란스키로 이어지는 완벽한 패스 플레이에 이은 슛이 골망을 흔들었지만 오프사이드 판정이 났다.

케르자코프의 간헐적인 슛을 제외하면 공을 돌리며 상황을 엿보던 러시아는 단 한번의 기회를 살려 선제골을 터트렸다. 지르코프가 과감한 오버래핑으로 유도한 프리킥 상황에서 아르샤빈이 감아 올린 것을 자고예프가 수비를 따돌리고 파고 들어 헤딩 슛으로 연결한 것. 자고예프는 대회 3호골로 득점 단독 선두를, 아르샤빈은 3호 도움으로 역시 그 부분 선수로 올라섰다. 폴란드는 순간적으로 자고예프에 대한 맨투맨 수비가 실종되며 좋았던 흐름을 한번에 넘겨주고 말았다. 득점 후에는 러시아 팬이 던진 폭죽이 그라운드로 날아와 꽂혔고 경기가 중단됐다. 폴란드 팬들의 심기를 자극하는 행동이었다.

자고예프의 활약은 이번 대회에서 가장 주목 받는 요소 중 하나다. 18세이던 2008년 CSKA 모스크바 입단 후 3년 사이 러시아 최고의 유망주에서 대표팀의 에이스로 등극한 자고예프는 이번 대회를 통해 그 동안 자신에게 관심을 보여 온 서유럽 명문클럽들의 직접적인 러브콜을 받을 것으로 보인다. 그에겐 롤 모델이 있다. 4년 전 유로2008에서의 맹활약으로 아스날에 입단한 아르샤빈이다. 아르샤빈 역시 아스날 입단 후에 보여줬던 강렬한 임팩트를 최근 2년 사이 서서히 읽어가며 지난 6개월 간은 제니트에서 임대 생활을 보내야 했다. 하지만 이번 대회를 통해 예의 날카로움을 자랑하고 있어 멀어져 가던 벵거 감독의 관심이 다시 환기될 수 있다. 돌아온 별과 떠오르는 별의 조합은 이번 대회에서 러시아를 떠받치는 힘이다.

멋진 동점골로 8강 진출에 대한 폴란드의 희망을 살린 브와슈치코프스키

▲ 폴란드의 희망을 살린 브와슈치코프스키
한 순간의 집중력 부족으로 주도권을 러시아에 내 준 폴란드는 후반 들어서도 좀처럼 자기 페이스를 찾지 못했다. 오히려 러시아는 아르샤빈과 자고예프를 필두로 추가골 사냥에 나섰다. 실점 이전과 비교해 너무나 활력이 떨어진 폴란드는 레반도프스키가 홀로 고군분투하며 간신히 버텨갔다. 그러던 후반 22분, 한순간에 동점골이 터졌다. 오브라니악이 측면에서 밀어준 패스를 주장 브와슈치코프스키가 감각적인 볼 터치로 러시아 수비 두 명을 제친 뒤 강력한 왼발 슛으로 골망을 갈랐다. 이번에는 반대로 폴란드가 러시아의 집중력을 파고 들어 골을 만들었다.

레반도프스키와 함께 폴란드가 가장 자랑하는 무기인 브와슈치코프스키의 동점골 직후 바르샤바 국립경기장은 홈 팬들의 압도적인 응원에 들썩거렸다. 경기장을 찾은 브로니슬라프 코모로프스키 현 대통령도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응원전에 가세했다. 동점골 이후 한층 불이 붙은 양팀 선수들은 거세게 충돌했고 무라프스키, 레반도프스키, 데니소프가 얽히고 설킨 끝에 결국 레반도프스키가 경고를 받기도 했다. 폴란드의 스무다 감독은 승점 3점을 따기 위해 수비형 미드필더 두드카를 빼고 공격수 미예르제프스키를 투입했다. 러시아의 아드보카트 감독도 파블류첸코, 이즈마일로프 등을 차례로 투입하며 맞불을 놨다. 하지만 경기가 거듭될수록 양팀 선수들은 지친 모습이었고 결국 추가골을 넣는 데 실패하며 1-1 무승부로 경기를 마쳤다.

지난 수년 간 히딩크의 유산을 지속적으로 상속했던 아드보카트는 이제 그 그림자를 뛰어넘길 원한다 (사진=연합뉴스)

▲ 아드보카트, 히딩크 그림자 넘기에 도전하다
러시아는 무승부를 거두는 데 그쳤지만 사실상 8강 진출에 성공한 분위기다. 1승 1무 승점 4점에 골득실이 +3인 러시아는 마지막 그리스전에서 패하더라도 2골 차 이상으로 패하지 않고 골득실 관리를 하면 최소 조2위로 8강에 오르게 된다. 4강에 올랐던 4년 전과 비교해도 돋보이는 성과다. 당시 히딩크 감독은 스페인과의 첫 경기에서 완패한 뒤 그리스, 스웨덴을 극적으로 꺾고 8강에 올라 조국 네덜란드를 물리치고 4강까지 갔었다.

아드보카트 감독은 ‘보급형 히딩크’다. 네덜란드 출신에, 같은 대표팀 감독 경력에, 걸어 온 궤적도 비슷하다. 특히 지난 수년 간은 히딩크의 발자취를 뒤따르며 그가 남긴 유산을 상속했다. 2006년 독일월드컵 당시 한국 대표팀이 그랬고 이번 러시아 대표팀도 동일하다. 유로2012 종료 후 러시아 대표팀과 작별하는 아드보카트 감독은 PSV 에인트호벤 감독으로 부임한다. 이번 대회를 준비하면서는 과거 ‘파워 트레이닝’을 주도한 네덜란드 최고의 피지컬 코치 ‘저승사자’ 베르하이엔을 불러 체계적인 관리를 했다.

4년 전 유로2008의 러시아가 정형화된 틀 안에서 100%의 역량을 발휘하는 히딩크 특유의 색깔이었다면, 지금의 러시아는 개인의 창의성에 무게를 두고 빠른 속도의 패스를 이용한 공격적인 축구를 펼친다. 그것이 아드보카트 감독의 업적인지, 아니면 유로2008 이후 러시아를 벗어나 더 큰 무대를 경험하고 돌아 온 선수들의 능력 덕분인지는 확실히 단언할 수 없다. 아드보카트 감독은 러시아 대표팀을 운용하면서 과거 자신이 이끌었던 제니트 출신 선수들을 중용한다. 체코전과 폴란드전 선발 명단 중 제니트 소속이 아닌 선수는 네명에 불과하다. CSKA, 스파르탁, 디나모 등 모스크바를 연고로 하는 주요 클럽 선수들을 중용하지 않아 여론의 공격도 받지만 어쨌든 아드보카트의 선택은 단기간에 조직력을 극대화하는 결과를 냈다.

아드보카트 감독은 언젠가부터 자신에게 꼬리표처럼 따라 붙은 히딩크와의 비교에서 우위에 서고 싶어한다. 자신보다 앞서가며 눈부신 성과를 낸 히딩크 이상의 성과를 내는 것이 목표다. 그가 이번 유로2012에서 우승을 목표라고 외친 것도 그 때문이다. 조별리그 두 경기에서 러시아는 좋은 경기를 펼쳤다. 홈에서의 응원을 등에 업은 폴란드를 상대로도 우세한 경기를 했다. 그리스와의 남은 관문을 돌파하면 아드보카트 감독은 그 목표에 한발 더 가까워진다. 과연 그는 히딩크의 그림자를 넘어 자신의 이름을 러시아 축구와 유럽 축구에 남길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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