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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BPI/스포탈코리아 |
스페인과 이탈리아의 경기는 C조의 개막전이었지만 내용과 수준으로 따지면 대회 결승전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환상적이었다. 축구팬들이 왜 유로2012를 기다려왔는지에 대한 완벽한 대답이 되어준 경기였다. 2006년과 2010년에 월드컵을 제패한 두 축구 열강은 팬들의 기대를 배반하지 않았다. 대회 개막 이후 생각보다 뜨겁지 않았던 이틀 간 부족했던 2%의 아쉬움을 일거에 달래준 명승부 중의 명승부였다.
스페인과 이탈리아의 선수들은 기술적으로 최고 수준을 보여줬다. 안드레스 이니에스타와 다비드 실바의 볼 컨트롤 기술은 입신의 경지에 도달한 듯 했다. 안토니오 카사노와 마리오 발로텔리의 승부욕과 테크닉을 기반으로 한 저돌성은 ‘악마적 재능’의 정의를 플레이로 내려주었다. 차비와 사비 알론소는 다시금 패스의 미학을 설파했고, 피를로는 아름다운 조율을, 클라우디오 마르키시오는 유려한 외모와 차이를 만들어내는 돌진으로 이탈리아 축구가 아직 ‘살아있다’고 부르짖었다.
골키퍼의 선방 대결도 눈부셨다. 세계 최고의 골키퍼 자리를 다투며 양국의 주장으로 활약 중인 이케르 카시야스와 잔루이지 부폰은 축구 종목에서 골대의 규격을 좀 더 넓혀야 골이 들어갈 수 있는 것이 아닌라가는 의구심을 들게 만들었다. 이러한 선수들의 개별적인 활약은 유럽축구의 기술적인 수준이 지금 어디까지 왔는가를 보여줬다.
▲ 위기는 진보의 씨앗, 스페인과 이탈리아의 변칙전술
하지만 그 보다 더 인상적인 것은 이들이 가진 것에 안주하지 않고 축구의 진보를 위해 고민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언제나 진보는 뜻하지 않은 위기에서 촉발된다. 다비드 비야를 부상으로 잃은 비센테 델보스케 감독은 선발 명단에 단 한 명의 전문 공격수도 내세우지 않고 ‘무톱(無-top)’ 전술을 펼쳤다. 승부조작 파문 속에 크리시토를 잃은 이탈리아의 체사레 프란델리 감독은 스페인의 중원 장악과 슈팅 세례를 저지하기 위해 중앙 미드필더 다니엘레 데로시를 센터백으로 전환시킨 5-3-2 전형을 시도했다.
스페인이 시도한 ‘무톱 전술’은 완전히 새로운 시도는 아니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볼을 소유하는 것을 추구하고, 힘과 속도 보다 기술을 중시하는 스페인의 축구 문화는 전통적인 의미의 스트라이커 없이도 경기를 지배할 수 있고 골을 만들어낼 수 있는 방식을 발전시켰다. 이번 스페인 대표팀은 무수히 많은 공격형 미드필더 자원을 바탕으로 ‘무톱 전술’의 최종 진화형을 구현하고 있다.
내용보다 결과를 중시하며, 많은 골보다 안정된 수비, 계획된 조직을 중시하는 이탈리아는 무차별적인 공격을 시도하는 스페인을 무력화시키기 위한 해결책을 찾아냈다. 최종 수비 라인 뒤에 스위퍼를 배치해 빗장을 걸어 잠그는 카테나치오를 발명한 이탈리아는 현대 축구의 변화상에 걸맞는 수비 전술의 진화를 이끌고 있다.
이탈리아는 발로텔리와 카사노를 제외한 8명의 선수들이 스페인 선수들의 위치에 따라 하프 라인 부근과 페널티 에어리어 부근을 오가며 거대한 성벽을 구축했다. 자케리니와 마조는 최후방과 중원을 오가며 스페인 공격을 가로막는 유기적인 측면 방파제 역할을 했다. 피를로의 체력 부담을 완벽하게 덜어준 마르키시오와 티아고 모타의 명민함과 헌신성도 인상적이었다.
스페인의 패스 플레이는 이탈리아의 성벽에 가로 막혀 튕겨져 나오기 일쑤였다. 볼 다루기에 있어선 축구 역사상 그 누구보다도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스페인은 이날 너무도 쉽게 볼을 잃었고, 소유권을 내줬다. 공격을 포기한 잠그기 전술이 아니라 빠른 위치 이동과 공수 전환을 바탕으로 한 역동적인 축구였다는 점에서 더 의미가 컸다.
지금까지 스페인을 상대한 팀들은 정적인 밀집 수비로 경기의 템포를 떨어트려 관전자들을 지루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이탈리아는 동적인 플레이로 수비를 구사하며 공격 상황에선 과감하게 전진해 전술적으로는 대등한 경기를 펼쳤다. 스페인을 지속적으로 위협했고, 경기는 한 시도 지루해지지 않았다. 스페인과 이탈리아의 전반전은 축구가 골이 없이도 충분히 행복한 스포츠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 좋은 예가 됐다.
▲ 축구의 진정한 재미는 골이 아닌 ‘발로 공을 다루는’ 그 자체
이탈리아의 잘 정비된 수비가 구현됐음에도 경기가 아름다움을 잃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문전의 공간을 극소화시킨 질식 수비에도 볼을 컨트롤하고 주고 받으며 공격 작업을 전개할 후 있었던 스페인 공격진의 놀라운 기술 때문이기도 했다. 이탈리아는 강력한 성벽을 구축했지만 이베리아 반도의 작은 천재들은 기어코 빈틈을 찾아냈다.
막는 쪽이나 뚫는 쪽이나 최고였다. 못 뚫는 것이 없는 창과 뚫리지 않는 방패가 벌이는 모순의 대결은 축구팬 유무를 떠나 경기를 지켜보는 모든 관전자들을 카타르시스로 몰고 갔다. 두 팀은 유럽 축구의 현재를 보여줬고, 미래를 제시했다. 축구의 진정한 재미는 공이 골망을 가를 때 뿐 아니라 발로 완벽하게 볼을 다루고 연결하며 플레이를 만들어 가는 것, 그리고 이를 막아서는 접전을 지켜볼 때라는 것을 새삼 깨닫게 했다. 그런 플레이를 통해 나온 이날 두 골은 명승부의 화룡점정이었다.
국가대표 경기는 클럽 축구에 비해 견고함과 조직력이 떨어지는 것이 당연하다. 절대적인 훈련 시간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이런 특성 때문에 대회 초반에 허점이 많이 드러난다. 그리고 경기를 치르고 상위 무대로 올라갈 수록 경기력이 다듬어진다. 결승전에 오를 때 쯤이면 세계 최고의 실력을 갖춘 선수들이 단기간 동안 정신력과 조직력을 최고치로 끌어올려 세상에서 가장 화려한 축구를 보여준다.
스페인과 이탈리아는 이날 황홀한 축구를 선보였다. 그러나 이는 시작이 불과하다. 두 팀은 이제 막 첫 발을 내디뎠을 뿐이다. 그래서 허점도 컸다.
스페인은 카를라스 푸욜이 빠진 수비진이 정신적으로나 호흡면에서 불안정한 모습을 보였다. 알바로 아르벨로아와 조르디 알바의 풀백 라인이 힘을 내지 못하면서 전방 공격진이 받는 부담도 이전보다 컸다. 페르난도 토레스는 골 감각이 돌아오지 않았고, 세스크 파브레가스도 부상의 후유증을 완전히 털어내지 못한 모습이었다. 데로시의 센터백 전환을 통한 새로운 시스템을 이제 막 적용한 이탈리아 역시 마찬가지다. 시스템이 자리를 잡기까지 시간이 더 필요하다.
스페인과 이탈리아는 C조에서 8강 티켓을 확보할 가장 유력한 팀으로 꼽힌다. 이날 보여준 경기력은 이 예상을 현실화하기 충분하다. 만약 두 팀이 재회한다면 대진표상 7월 1일 키에프에서 열리는 결승전이 유일한 기회다. 그리고 두 팀이 재회할 가능성은 충분해 보인다. 스페인과 이탈리아의 재회가 이루어질 수 있을까? 아니면 또 다른 다크호스가 보다 앞선 축구로 이들의 발목을 붙잡을 수 있을까? 기다리고 기다렸던, 축구팬들의 로망 ‘UEFA 유로’가 이제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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