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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이야기/일상이야기

105년전 강제로 을사늑약 비운의 중명전 복원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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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가 한반도를 강제 병합하는 시발점인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됐던 비운의 장소 덕수궁 중명전(重明殿)이 복원됐다. 일반인에게는 한ㆍ일 병합 100년을 맞는 29일 공개된다.

1905년 11월 17일 일본 특파대사 이토 히로부미가 거만한 모습으로 덕수궁 중명전(重明殿)에 나타났다. 대한제국 모든 외교권을 일본에 위임할 것을 요구하는 이른바 `보호조약안`을 내놓고 인허를 요구했다. 오후 3시 어전회의가 열렸으나 고종은 회의 도중 몸이 편치 않다며 침전인 함녕전으로 돌아갔다. 이토 히로부미의 강권을 거부한 한규설은 1층 마루방에 감금됐다. 이윽고 다음날 새벽 1시께 친일파들이 거든 가운데 일본 측이 바라는 대로 이뤄졌다. 바로 을사조약이 체결된 것이다. 

2년 뒤인 1907년 고종은 을사늑약에 대한 불법성을 국제사회에 알리기 위해 비밀리에 특사를 조직해 제2차 만국평화회의가 열린 네덜란드 헤이그에 보냈다. 그러나 결국 이 일은 일제에 발각돼 고종은 강제 퇴위당했다. 고종이 이준 특사를 파견했던 장소가 또 중명전이었다. 

서울 한복판 덕수궁에 있는 중명전은 이렇듯 `비운의 역사`를 간직한 현장이다. 3년간 복원공사 끝에 29일 일반공개를 앞둔 중명전이 26일 언론에 공개됐다. 

`무거운 빛의 큰 집`이라는 의미인 중명전은 덕수궁 돌담길을 지나 정동극장 옆 구석진 골목에 위치해 있다. 붉은 벽돌과 아치형 건축 양식이 도드라진 2층짜리 러시아풍 건물이다. 러시아 건축가 사바친이 우리나라 최초 신식 도서관으로 1897년 지었지만 1904년 덕수궁 화재로 고종이 거처를 이곳으로 옮기면서 파란만장한 역사의 중심이 됐다. 고종은 중명전에서 3년간 집무를 봤으며 외국인을 접견했다. 

문화재청 관계자는 "러시아와 일본 문헌자료를 참조해 1897년 건립 당시와 최대한 가깝게 복원하려고 노력했다"고 설명했다. 내부 전등과 벽난로도 고풍스러운 느낌을 자아낸다. 지하 1층은 미로처럼 여러 방으로 구성됐는데 그 용도는 아직까지 알려지지 않았다. 

중명전은 1925년 화재로 외벽과 속 낭하만 남기고 대부분 타버렸다. 광복 후에는 외국인 클럽 건물로 쓰였으며 자유당 정부가 들어서며 왕실 재산으로 편입됐지만 70년대 말 개인에게 팔리는 수난을 겪었다. 

문화재청은 2006년 정동극장 측에서 중명전 소유권을 넘겨받아 이듬해 12월부터 원형 복원에 들어갔다. 

이재서 문화재청 궁능문화재과 서기관은 "중명전은 일제 식민지와 광복 후에도 원래 목적을 잃어버린 채 방치됐다"며 "일반 개방(29일)을 통해 아픈 역사를 되돌아보는 교육장이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중명전 내부에 들어가면 총 5개의 전시실이 펼쳐진다. 1층에는 중명전의 연혁과 을사늑약의 급박한 현장이 드러나고 헤이그 특사의 활동과 긴 여정이 지도로 그려져 있다. 2층에는 중명전의 주인인 고종의 집무 공간을 엿볼 수 있다. 중명전 관람은 수용인원과 문화재 보호 등을 고려해 1일 6회 실시하며, 안내자 인솔에 따라 회당 25명씩으로 관람 인원이 제한된다. 관람료는 무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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