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벌어진 두산과 LG의 벤치 클리어링. 매 시즌 벤치 클리어링은 반복된다(사진=연합뉴스) |
목적은 수단을 얼마나 정당화할 수 있는가. 지난 주말, 한 공당 안에서 벌어졌던 폭력 사태를 보며 그런 생각이 들었다. 사실 그쪽 바닥에서 몸싸움을 보는 건 그리 놀랄 일이 아니다. 그리고 그 주체가 여권이건 야권이건, 그 행동들은 흠결이 있을지언정 대의라는 목적을 위해 때로 정당화될 수 있다는 게 그곳의 논리였다. 한 언론인은 매체 기고를 통해 이번 일을 주도했던 이들이 ‘목표의 정당성이 수단을 정당화해준다’는 믿음으로 ‘절차적 민주주의의 훼손’을 정당화하는데 익숙하다고 진단하기도 했다. 과연 지난 주말에 벌어졌던 일이 숭고한 대의를 품었던 건지는 알 수 없지만.
룰 바깥의 폭력도 게임의 일부가 될 수 있는가
조금은 엉뚱하지만 이번 일을 보며 ‘벤치 클리어링도 야구의 일부인가’라는 오래된 질문이 떠오른 건 그래서다. 정치판의 몸싸움만큼 야구에서의 벤치 클리어링도 빈번하게 벌어지는 일이다. 전자가 소통과 합의라는 공인된 수단 바깥에서 공공연하게 벌어지는 것이라면, 후자 역시 공과 배트를 이용한 공격과 수비 바깥에서 벌어지는, 요컨대 룰 바깥에서 벌어지는 일이다. 심지어 폭력적으로. 때문에 야구를 오직 게임의 룰 안에서만 파악한다면 벤치 클리어링은 결코 야구의 일부가 될 수 없다.
얼마 전 한 공당에서 벌어진 폭력 사태. 과연 이런 폭력도 목적을 위해 정당화될 수 있는가(사진=연합뉴스) |
이 때 자주 등장하는 것이 앞서 말한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해준다는 논리다. 스포츠는 승자와 패자가 갈릴 수밖에 없는 유사 전쟁에 가까운 게임이고 이기기 위한 신경전 중 벌어지는 일탈로서의 벤치 클리어링은 변수가 아닌 상수라는 것이다. 실제로 기세 싸움이 중요한 야구에 있어 이것은 어느 정도 사실일 것이다. 가령 비디오 판독을 해도 분명히 옳은 판정임에도 감독이 나와 항의를 하는 것이 팀 사기를 위해 어느 정도 공인된 꼼수인 것처럼. 메이저리그에서 벤치 클리어링에 참여하지 않는 선수에 대해 구단 차원에서 벌금을 물리는 건 그래서다. 그 어떤 스포츠보다 분업화된 시스템을 갖추고 있는 야구에서 팀워크의 중요성은 두말할 여지가 없으며 그래서 서로를 믿고 의지하는 강한 동료애가 필요하다.
실제로 지난 4월, 자신에게 날아온 빈볼 때문에 벌어진 벤치 클리어링을 경험한 메이저리그의 추신수는 이후 오히려 동료들이 똘똘 뭉쳤으며 팀 성적도 더 좋아졌다고 밝혔다. 하지만 아무리 승리를 위한 행동이라 해도 앞서 말한 것처럼 이것은 룰 바깥에서 벌어지는 전쟁이다. 9 대 0으로 이기고 있는 상황에서도 9회초에 도루 작전을 펼치는 그런 차원의 전술이 아니라는 것이다.
폭력이 긍정될 수 있는 유일한 상황
종종 야구팬들에게 한국 프로야구 역대 최악으로 꼽히는 1990년 삼성과 OB(현 두산)가 벌인 벤치 클리어링에서는 말리던 주심이 갈비뼈에 금이 가고, 폭력의 정도가 너무 심해 삼성의 강기웅과 OB의 이복근이 형사 입건되었다. 최악이라는 말처럼 이 정도의 몸싸움은 흔히 일어나는 일이 아니지만, 승리를 위해 폭력도 불사할 수 있다는 논리는 결국 야구를 야구가 아닌 상황까지 이끌 수 있다. 즉 이런 벤치 클리어링을 야구의 일부로 받아들일 수는 없다. 그렇다면 과연, 이 폭력을 야구라는 게임 안에서 정당화할 수 있는 토대는 어디서 찾을 수 있는가.
선진 야구의 정점인 메이저리그에서도 벤치 클리어링은 벌어진다(사진=연합뉴스) |
흥미롭게도, 이에 대한 대답은 야구와는 거리가 먼 정치 철학자인 프랑스의 메를로 퐁티에게서 구할 수 있다. 그는 저서 <휴머니즘과 폭력>에서 ‘폭력을 행사하는 자들에 대해 폭력을 자제하는 것은 그들의 공모자가 되는 것이다. 우리는 순수함과 폭력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다. 다양한 폭력 중에서 어느 하나를 택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에 따르면 세상은 흑과 백으로 명백히 나뉠 수 없고, 다양한 종류의 폭력이 혼재되어 있다. 하지만 그래서 그 폭력들이 정당화된다는 건 아니다. 그가 옹호하고자 했던 폭력은 폭력 자체를 지양하는 폭력, 다른 더 큰 폭력을 막을 수 있는 단 하나의 폭력이다. 그래서 그는 ‘폭력 없이도 사회를 만들 수 있었다면 그 길을 택할 수도 있다’고 말한다.
야구팬을 위한 정치학, 정치인을 위한 야구 이론
1960년대만 해도 메이저리그의 투수들은 타자가 타석에 바짝 붙으면 몸쪽 공으로 위협하거나 머리를 향해 던지는 걸 매우 당연하게 생각했다. 역대 최고의 헤드 헌터 돈 드라이스데일은 몸쪽으로 붙으면 할머니라도 맞춰버리겠다고 말할 정도였다. 하지만 바로 그 돈 드라이스데일은 또한 상대팀 투수가 자기 편 타자 한 명을 맞히면 자신은 두 명을 맞혀 보복하겠노라고 했다. 적반하장 같지만 이런 보복성 빈볼을 통해 빈볼의 비율이 확 줄었다는 건 상당히 흥미로운 현상이다. 즉 어떤 종류의 폭력은 폭력을 억제하는 효과가 있다.
전설적 투수이자 헤드 헌터인 돈 드라이스데일(사진 왼쪽). 그는 또한 보복성 빈볼로도 유명했다(사진=연합뉴스) |
전설적 야구 기자인 레너드 코페트는 <야구란 무엇인가>에서 ‘전에는 당연한 투구 패턴으로 받아들이던 몸쪽 공을 던졌다간 집단 싸움이 벌어진다’고 말했다. 즉 벤치 클리어링은 감정싸움이기도 하지만 빈볼이라는 폭력에 대한 응징이자 다음에는 그러지 말라는 경고로서의 폭력인 셈이다. 물론 앞서 말한 삼성과 OB의 벤치 클리어링도 빈볼 시비 때문에 생긴 것이고, 때로 빈볼보다 더 큰 피해를 입힐 수도 있다. 메를로 퐁티의 말을 빌리자면, 만약 폭력 없이도 야구가 가능하다면 보복성 빈볼이나 벤치 클리어링은 사라져야 마땅하다. 하지만 그럴 수 없다면, 이런 폭력은 다른 폭력을 억지할 수 있는 딱 그 차원에서만 조심스럽게 긍정되어야 한다.
벤치 클리어링은 야구의 일부인가? 그럴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몸싸움도 정치 활동의 일부인가? 그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다시 말하지만 폭력은 더 큰 폭력을 막을 단 하나의 방법론일 때만 존재 가치가 있다. 자신과 뜻을 같이 하는 동료들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자기들이 옳다고 믿는 주장을 관철하기 위해, 심지어 그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던 것도 아닐 때, 그 어떤 폭력적 수단도 목적을 위해 정당화 될 수는 없다. 때로 불가피하게 폭력이 필요할 수 있다는 명제가 성찰 없이 폭력을 써도 된다는 무책임한 말로 치환될 수는 없다. 그것이 정치든, 야구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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