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박람회로 인해 여수는 지금 세계인의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박람회는 분명 여수를 한 단계 업그레이드시켜 놓은 국제적인 행사임이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박람회 도시 여수의 화려함 뒤에는 국가로부터 희생당하고 있는 여수 시민들도 있습니다. 61년 전 국가의 부름을 받고 전장에서 용감히 싸우다 전사했지만 군에서는 '총살'이라며,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습니다. 군의 주장이 허위로 밝혀졌는데도 사법부는 이를 인정치 않고 여전히 '불명예제대'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억울함을 호소합니다. <기자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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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월 29일 <'전사' 증언 18년째...'총살' 누명 벗나?>의 기사가 나간 이후 하루 만에 기자에게 한 통의 쪽지가 도착했습니다.
<오마이뉴스>기사를 본 한 대학 교수의 쪽지였습니다. 내용인즉 큰아버님에 관한 사항에 대해 자세히 말해주면 돕겠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도움을 구하는 있는 저희들에겐 선한 사마리아인이 나타난 격입니다.
쪽지를 보낸 분은 모대학교 근무하는 이아무개 교수님이었습니다. 저하고는 이번 일로 알게된 생면부지(生面不知)의 타인입니다.
지난 2일 사촌형님을 모시고 교수님을 만나기로 약속한 전주시내를 찾아갔습니다. 이날 전주시내의 커피숍에서 이 교수님을 만나 장장 6시간 동안 큰아버님에 대한 조언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이 교수님 역시 우리와 비슷한 경우를 당했다고 합니다. 군에서 수류탄을 맞고 전상으로 제대하신 아버님을 유공자로 인정받기 위해 국방부와 8년간의 싸움을 시작했습니다.
교수님의 집은 어릴적 아버지의 전우들이 자주 찾는 전상자의 집합소였습니다. 어린 시절 전쟁으로 팔을 잃은 아버님의 전우는 가젯트 팔처럼 생긴 갈고리 손으로 용돈을 주었습니다. 당시 무서웠던 기억과 공부 열심히 하라는 말은 항상 기억에 남아 비뚫어지지 않았다고 전했습니다. 그 돈은 바로 넝마라는 지게를 지고 박스를 주워 모은 돈이었습니다.
또 교수님의 아버님은 6.25 참전용사로 수류탄 파편에 맞아 무릎이 깨지고 부상으로 인해 후유증을 앓았다고 합니다. 어릴 적 아버님에 대한 훈장을 보고 자랐는데 이후 장성하여 아버님의 명예회복에 나섰습니다. 그런데 청와대와 국방부에 민원을 넣었지만 돌아오는 것은 군대 간 사실 없다는 통보뿐이었습니다. 참 황당했다고 합니다. 그의 집요한 노력끝에 마침내 아버님의 군 기록을 찾아낸 결과 부친과 같은 동명이인은 303명이나 있었다고 합니다. 군 당국에서는 이런 핑계를 대었다고 합니다.
"당시 기록은 한글이 아닌 한문 초서체로 흘려 써서 신병들이 못 찾아 알 수 없었다. 본적지, 나이, 생년월일, 이름만 되어 있다. 집에서 알고 있던 생일과 본적이 틀리다. 생일 틀리면 다른 사람 나온다. 뭐 이런 식으로 둘러댔습니다. 또한 마지막 육군본부 기록정보단에서는 당시 기록이 휘발되어 없다고 하더군요."
이후 8년이라는 긴 싸움 끝에 마침내 2009년 6월 국가유공자로 인정받아 부모님을 대전현충원에 안장되었습니다. 그의 끈기가 아버님의 명예회복을 찾는 순간이었습니다. 아버님이 돌아가신지 29년만의 일이었습니다
이 교수님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작년 9월 남원에 사는 김순희씨는 52년에 입대한 친정아버님에 대해 유공자 판정을 받았습니다. 아버님은 52년 군에 입대해 10개월 만에 전상을 당해 53년 2월 명예제대로 '보통상의기장'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보훈청에선 인력이 없다는 이유로 보훈 심사가 불가능하다고 통보 받았습니다. 이후 이 교수님의 도움으로 유공자 판정을 받았습니다.
또한 울산에 사는 김용진(58세)씨는 아버님이 포탄파편이 오른쪽 허벅지와 팔꿈치에 박힌 채 생활하다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유공자 판정은 거부당했습니다. 이후 이 교수님의 도움으로 작년 10월 유공자 신청을 해 올 5월 유공자로 인정받아 현충원에 안장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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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지난 5월 31일 열린 심질수씨의 부친 심옥동은 행정심판 2심에서 기각 판정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판결문은 아직 나오지 않아 기각 이유를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이에 대해 법무법인 자우 김주원 변호사는 "이제 마지막 대법원 상고가 남아 있으나 기각될 가능성이 높다"면서 "상고심에서 원심파기로 판결될 가능성은 1% 이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이어 "판결문이 나와야 그 이유를 알 수 있지만 대개 상고심이 받아 들여지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면서 대법원서 판결이 뒤바뀔 가능성이 낮다고 점치고 있습니다.
또한 이 교수님 면담 후 4일 심옥동의 아들 심질수씨는 광주병무청에 사형수 심옥동(1925년생)에 대해 병적증명서 발급을 요청했습니다. 그런데 거절당했습니다.
광주지방병무청 고객지원과 관계자는 그 이유를 묻는 기자의 질문에 "사형수 심옥동(1925년생)은 심질수의 부친이 아니기 때문에 떼어줄 수 없다"라고 말했습니다. 이후 기자는 "1925년생 사형수 심옥동에 대해 알려 달라"라고 묻자 "1925년생 심옥동이 총살인지 알려드릴 수 없다"라고 답변했습니다.
이어 심옥동의 거주표가 있는지를 묻자 "육군본부에서 있는지 없는지 모르겠지만 병무청에는 수기로 작성된 자료만 있다. 거주표(병적기록표)양식으로 내용들이 기재되어 있는데 모든 자료는 군 본부에서 생성된 자료다. 군 본부에서 해당 사항을 확인하라"고 답변했습니다. 거주표가 없다는 지금까지의 답변과는 다른 내용이었습니다.
다음은 이 교수님과의 일문일답입니다.
- 아버님이 유공자로 된 심정이 어땠나?
"저희 아버님께서는 돌아가신 지 29년이 흘렀는데 국가와 싸운 지 8년 만에 유공자로 인정받았다. 이후 2009년 6월 25일 대전 현충원에 안장되셨다. 안장되고도 계급, 병적사항을 정정해 3번의 묘비가 바뀌었다. 우선 보훈청에서 대형 태극기와 유공자 증이 나왔다. 현충원에 모실 때 국가에서 경건하고 엄숙하게 영결식을 치러줬다. 영결식 때 엄청 울었다. 그동안 그렇게 국가에 대해 원망도 많이 했지만 현충원에 안장되던 날 생각이 바뀌더라. 그렇지 국가는 이렇게 해야 된다고 생각했다. 아이들에게 산교육이 되었다. 지금도 좋은 일 있으면 아버님과 어머님께찾아가 말씀 드린다."
- 전사가 되어도 국가유공자로 인정받기 힘들다. 어떻게 해야 유공자로 인정받을 수 있나?
"요즘에는 인우보증인 진술이 굉장히 중요해졌다. 유공자 등록신청, 병상일지, 인우보증인만 있어도 유공자로 인정된다. 나 같은 경우 전상관련 기록 찾고 국회에서 전투 중 부상자에 대한 특별법이 만들어진 것과 아버님에 대한 모순점을 찾았다. 이후 경로를 추적해 전상경로까지 찾았다. 그 다음 거주표를 찾았다. 군에서는 유공자 신청을 받으려고 하면 유족에서 입증책임을 요구하고 있다. 하지만 관련 자료를 못 찾는 것은 정부책임이다. 정부의 행정미스다. 국가의 잘못인 것이다. 그런데 개인의 책임으로 떠넘기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 아버님이 어렵게 국가 유공자로 결정되었다. 과정이 어땠나?
"정말 어렵게 유공자로 결정되었다. 국회. 청와대. 국방부. 육군본부. 소속사단. 전쟁사박물관. 병무청 등을 상대로 싸웠다. 아버님 같은 경우 동명이인이 300명이 넘었다. 보훈청 직원들이 안 됩니다. 이런 경우 유공자로 돼 본적도 없고 힘듭니다. 어려운 쌈하고 계십니다 그랬다. 그런데 유공자로 바뀌자 태도가 180도로 바뀌더라. 국가 보훈청에 근무하면서 당신처럼 효자인 사람은 처음 본다고 말하더라."
- 한국전쟁 이후 전사. 전몰. 전상자가 얼마나 되는가?
"전쟁 이후 아직도 보상받지 못한 15만 명의 전사자와 전상군인이 있다. 이들은 국가를 위해 싸우다 돌아가신 분들이 구천을 떠돌고 있다. 국가의 혜택을 받지 못하고 있는데 국가는 유족 책임으로 돌리고 있다. 이것이 우리 보훈청의 가장 큰 문제다."
- 왜 유공자로 인정받기가 힘든가?
"먼저 보훈청의 문턱이 너무 높다. 옛날에는 보훈청이 너무 고압적이고 무시로 일관했다. 상이군인인 참전용사는 국가의 제대로 된 보상을 받지 못하고 몸이 불편해 못살다 보니 자녀인 2세들이 하나같이 교육을 못 받았다. 그 결과 변변한 직업이 없으니 무시당한다. 이들이 보상을 받기 위해 매달리면 생업을 포기해야 하기 때문에 대부분 유공자 신청을 포기하는 경우가 많다. 억울해도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물고 늘어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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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사(戰死)와 전상(戰傷)의 차이는 무엇인가?
"전사는 개죽음이다. 얼마 전 전사자 보상금이 오천 원이 나왔다고 신문에 난 적이 있다. 조국을 위해 희생된 용사가 완전 개 값만치도 못한 꼴이다. 하지만 현행법상 전상자는 매달 400만원을 받을 수 있다. 우리나라 보훈체계는 죽은 사람이 아니라 살아 있는 경우 지장을 받는 것을 보상해 주는 시각에 맞추어져 있다."
- 국가유공자 신청을 도와주고 있다. 쉬운일이 아닐텐데...
"작년 8월부터 시작했다. 올 5월까지 저에게 16명이 유공자 관련 문의를 했다. 최근 5월 30일에는 울산 분이 유공자로 결정되었다. 이중 15명이 유공자로 인정받았다. 한 달에 한 명꼴이다. 알음알음으로 서울. 대전. 부산. 남원 등 전국에서 저에게 유공자 문의를 해오고 있다. 심지어 미국에 계신 분도 카톡으로 제게 문의를 해와 유공자가 된 분도 있다."
- 이 일을 시작한 계기는?
"8년간 어려운 싸움 끝에 아버님을 현충원에 안장했다. 사실 고생은 했지만 부모님의 명예를 찾은 것에 자부심을 느꼈다. 이후 유골함을 받으로 보훈청에 갔다. 거기에는 고엽제 참전용사가 후유증으로 몸을 떨면서 박카스를 따는데 어려움을 겪는 모습을 보았다. 그런데 보훈청 상담직원이 손을 덜덜 떨면서 박카스를 못 따고 있는 그분에게 굉장히 사무적으로 대하더라. 내가 이 같은 일을 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육군본부에 갔더니 발목이 없는 80먹은 참전용사가 쩔뚝거리며 병적기록부를 찾으러 왔는데 병적 기록부가 없더라. 참 황당했다. 아버님 일로 많은 어려움을 알고 있기에 이후 내일로만 끝낼 사안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내가 체득한 것을 내 같은 경우를 당한 사람들에게 돌려줘야겠다고 생각했다. 동시대를 살아가면서 내일이 아니지만 배운 사람으로서 나눠주고 해결해야 할 일이라 생각한다."
이런 황당한 경우는 처음 "전사자가 사형수와 뒤바뀐 경우다"
- 오늘 큰아버님(심옥동)의 서류를 보니 어떠한 생각이 드는가?
"심옥동 할아버지의 서류를 훑어봤지만 이같이 뒤틀린 경우는 처음 본다. 지금까지 이렇게 많은 서류를 갖춘 경우가 없었다. 그런데 군에서 준 서류가 너무 안 맞다. 뭔가 짜 맞추기 한 느낌이다. 큰아버지 군번이 동명이인의 사형수 심옥동에게 덧씌워진 느낌이다. 사형 받은 사람은 큰아버지가 아닌 다른 사람이다. 또 군에선 거주표와 인사명령지가 없다고 했지만 자료를 보니 1931이라 쓰인 문서는 육군 자료다. 인사명령자료일 가능성이 크다. 심옥동씨 같은 경우 51년도 5월 전쟁이 나고 군에 갔다. 제주훈련소에서 훈련을 마치면 7월 중순 내지는 8월쯤 자대에 배치된다. 그러면 계급이 이등병이다. 그런데 육본자료 판결문을 보면 1925년생 사형수 심옥동은 일등병으로 나와 있다. 생년월일, 한문이름도 틀리다. 당시 사형수 나이가 27세(1925년생)다. 그런데 큰아버지인 심옥동은 21살(1930년생)이지 않나. 무려 5살 차이가 난다. 판결문에 분명히 나와 있다. 이는 100% 국가 잘못이다. 다시 한번 국민신문고에 억울함을 호소하고 대전기록원에서 군 의문사위에서 조사한 1000페이지 불량의 자료를 요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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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큰아버님(심옥동)의 경우 핵심은 무엇인가?
"전사자가 사형수와 총살로 뒤바뀐 경우다. 군의문사는 매화장 보고서가 허위라고 결론 내렸다. 인사명령지도 없고 거주표가 없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그러면 이건 국가가 아니다. 제주도 훈련소에서 훈련을 받고 자대 배치되었다. 그런데 심옥동 큰아버님 것만 송두리째 없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당연히 있어야 할 영구문서가 없는 책임은 국가책임이다. 군 의문사에서도 국가책임이라고 했는데 말이 안 된다. 국정감사를 해야한다. 또한 2009년 이후 국가유공자로 인정받으려면 인우보증인 2명만 있어도 된다. 큰아버님 같은 경우 동기 김소동씨의 육성녹음 증거가 있고 군 의문사에서 조사한 마을 사람들이 군에 가서 돌아오지 않았다고 증언한 자료가 있다. 우리 아버님 같은 경우도 군번. 생년월일. 훈련소 부대 전속 인사명령지가 2008년 말까지 없다 했는데 2009년 4월 찾았다. 2008년 이후 5년간 계획으로 군 자료를 DB화가 마무리 되었는데 아직도 모순된 부분이 많다. 동명이인인 1925년생 사형수 심옥동에 대해 입증해 달라고 요구해야 한다."
- 군에서는 유가족에게 입증책임이 있다고 한다.
"이 사건은 초기에 알았으면 법원까지 갈 필요 없는 사안이라고 본다. 그런데 뭔가 잘못 되어도 한참 잘못되었다. 더욱 황당한 것은 사법부 2심에서 기각되었다. 그런데 지금까지 18년 동안 유가족이 할 수 있는 방법과 도리는 다 했다고 본다. 전우의 증언과 육성기록. 군의문사 진상규명위원회, 수없이 육군본부와 병무청을 드나들며 많은 자료를 확보했지만 군에서는 자체 발급서류를 스스로 부정해 왔다. 재심청구가 가능하리라 본다."
- 국가유공자 신청을 준비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한마디?
"우리 세대의 아픔이다. 국가를 위해 몸 바친 분들이 제대로 보상을 받지 못했다. 그 이유는 먹고 살기 힘든 생업에 시달려왔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제라도 더 늦기 전에 고인의 명예를 되찾아야 한다. 사실 별다른 방법이 없다. 뭔가 아는 놈들이 도움을 줘야 되지 않겠나 싶다. 그래서 어렵게 나선 것이다. 내가 힘닿는데 까지 조국을 위해 목숨 바친 분들께 최선을 다해 그분의 명예를 찾아 드리고 싶다. 또한 대한민국이 세계10권의 무역국가지만 국가를 위한 그분들의 헌신이나 희생이 아니었다면 대한민국의 오늘이 있을 수 없다. 이제까지 대한민국 정부의 보훈행정은 너무 엄격했다. 미국정부는 이런 일이 있으면 장교가 파견되어 찾아내 보상을 해준다. 그런데 대한민국은 거꾸로다. 참 이상한 행정이다."
- 향후 계획과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내는 죽는 날까지 이 일을 할 것이다. 지금까지는 100명을 목표로 생각하고 있다. 전쟁에 참전했다가 국가의 버림을 받고 구천을 맴도는 원혼을 달래주고 싶다. 이 나라를 위해 희생하신 분들의 자녀를 돕겠다고 다짐했다. 1년이 조금 넘었지만 15명이 유공자가 되었으니 15%를 달성한 셈이다. 지금까지 도움 받은 분들이 모임을 만들자고 한다. 내가 도움이 되었다면 주변사람들에게 10명씩 도와주라 그것이 내게 받은 빚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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