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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관련/프로야구

'두려움은 저 멀리’ NC 나성범의 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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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학교 출신 선수들에게 ‘나성범’은 지긋지긋한 이름이다. “연세대와의 정기전을 4년간 경험한 한 선수는 “4년 동안 정기전을 할 때마다 나성범 하나와 싸웠던 것 같다”고 했다. 그럴 만도 하다. 나성범은 연세대 입학 첫 해부터 3학년 때까지 매년 정기전 때마다 선발로 나와서 경기 끝날 때까지 혼자 던졌다. 세 차례 완투한 결과는 1승 1무 1패. 4학년인 지난해는 2회부터 두 번째 투수로 나와 7.2이닝을 단 2안타만 내주는 호투로 승리투수가 됐다. 9회 마지막 타자를 아웃으로 잡아낸 뒤 나성범은 마운드에 무릎을 꿇고 포효했다. 그리고 얼마 후, 나성범은 타자로 전향했다.

“투수로 나와서 그렇게 던져놓고 타자로 가버리면, 고려대 타자들이 뭐가 됩니까?” 고대 출신의 한 야구인이 허탈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퓨처스리그 타격 전 부문을 석권하고 있는 NC의 간판타자 나성범. 타자 전향 반년만에 팀의 중심타자로 올라섰다. (사진=NC 다이노스)

나성범이 타자로 전향한지 6개월이 지났다. 개막 한 달을 맞은 현재, 2012 퓨처스리그에서 나성범은 타격과 관련된 모든 부문에서 1위를 달리는 중이다. 타율(0.466), 출루율(0.564), 장타율(0.879)은 물론이고 최다안타(27), 홈런(5), 도루(10), 타점(22), 득점(18)까지 죄다 1위다. 그야말로 퓨처스리그를 집어삼키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난해까지 투수를 하다 전향한 선수의 기록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다. 누군가 ‘퓨처스리그 투수들이 뭐가 됩니까?’라고 물어봐도 할 말이 없는 기록이다.

“저도 이렇게까지 잘 맞을 줄은 몰랐어요,” 퓨처스 타격 전관왕을 노리는 나성범의 말이다. “넥센과의 개막 두 경기에서 7타수 1안타로 부진했어요. 생각대로 안 맞는구나, 아직 많이 부족하구나 하고 생각했죠. 그런데 마산 롯데전에서 첫 타석에 2루타를 치면서부터, 조금씩 타석에서 편안해지더라구요. 그 뒤로 계속 좋은 결과가 나오면서 자신감을 많이 얻었습니다. 어떤 공이 오더라도 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죠.”

리그를 지배하는 성적에는 반대급부도 따른다. 다른 기록들이 워낙 굉장한 탓에 눈에 띄지 않지만, 나성범이 압도적인 1위를 기록 중인 부문이 또 하나 있다. 19경기를 치른 현재 10개나 되는 몸에 맞는 공이다. 남부리그 2위 KIA 백세웅(3개)과는 7개 차이. 롯데(9개) 팀 전체의 몸에 맞는 공보다 나성범 혼자 맞은 공이 더 많다. 지금 추세가 계속되면 시즌이 끝날 즈음엔 무려 52개의 몸에 맞는 공을 기록하게 될 판이다. 100년이 넘는 역사의 메이저리그에서도 한 시즌 최다 몸에 맞는 공은 1896년 휴이 제닝스가 남긴 51개가 최다 기록이다. NC 김광림 타격코치가 “전에도 퓨처스팀에 있어 봤지만 이렇게 한 선수가 몸에 자주 맞는 건 처음 봤다”고 이야기할 정도다.

왜 이렇게 몸에 맞는 공이 자주 나오는 것일까. 나성범의 근육질 몸이 포수 미트와 비슷하게 생기기라도 한 것일까. 김광림 코치는 “나성범이 워낙 잘하고 있다. 그게 가장 큰 이유”라고 설명한다. “지금 퓨처스에서 4할이 넘는 타율에 타점도 많고 투수들의 최대 경계 대상이잖아요. 몸쪽으로 던지지 않을 수가 없는데, 그렇다고 어설프게 던졌다가는 큰 것을 맞게 되니까요. 그래서 코너워크를 신경쓰고 몸쪽으로 바짝 붙이려다 보니까 실투가 되면서 몸에 맞는 게 잦아지는 것 같습니다.”

김정준 SBS-ESPN 해설위원은 이를 타자에게 공에 대한 두려움을 심어주려는 투수들의 기본적인 전략으로 풀이한다. “공이 몸에 계속 맞다 보면, 타자는 무의식적으로 몸쪽으로 오는 공에 두려움을 갖게 됩니다. 몸쪽에 붙는 공이 오면 반사적으로 몸이 도망가게 되죠. 그러다 보면 타격의 밸런스가 무너지면서 제대로 된 타격을 할 수 없게 됩니다. 바깥쪽 공에 대한 대응도 취약해지구요. 그걸 노리는 거죠.” 김광림 코치도 “140km/h 이상의 공이 계속 몸쪽에 날아오면, 게다가 한번 잘못 맞아서 크게 통증을 느끼고 나면 공포심이 생기게 마련”이라고 설명했다. 투수가 살려면 타자 몸쪽으로 공을 던져야 한다. 그래서 돈 드라이스데일 같은 투수는 “몸쪽으로 붙는 놈이 있다면 내 할머니라도 맞혀버리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퓨처스리그 투수들은, 최소한 나성범 같은 할머니를 둔 적은 없는 것처럼 보인다.



나성범은 연일 계속되는 투수들의 견제에 "투수를 해봤기 때문에 이해한다"면서도 "몸쪽 공이 온다고 해서 위축되지는 않는다"고 자신있게 말했다. (사진=배지헌)

연일 계속되는 야구공 세례에 나성범의 몸은 멍투성이가 된지 오래다. NC의 한 관계자는 “함께 사우나를 갈 일이 있었는데 깜짝 놀랐다”며 “몸이 성한 데가 없었다. 여기저기가 다 피멍이 들어서 보기 안쓰러울 정도였다. 굉장히 아플 텐데도 참으면서 경기에 나가는 게 대단하다”고 혀를 내둘렀다. 그렇다면 나성범 본인의 생각은 어떨까.

“처음에는 다른 팀에서 나를 왜 이렇게 싫어할까, 하는 생각도 들었어요.” 나성범이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감독님, 코치님들도 견제가 심해질 거다, 몸에 맞는 공이 많이 나올 거라고 말씀하셔서 어느 정도 예상은 했죠. 하지만 이 정도로 많이 맞을 줄은 몰랐습니다. 처음에 한두개 맞을 때는 그런가 보다 했는데 너무 자주 날아오니까요.”

그렇다고 그가 다른 투수들에 대해 불만을 표하는 것은 아니다. “저도 투수 출신이라서 이해하는 부분은 있어요.” 나성범의 얘기다. “저도 투수를 하면서 몸쪽 공을 던져야만 하는 상황이 많았고, 몸쪽에 붙이려다 타자 몸에 맞힌 적이 많았기 때문에 이해는 되죠. 아무리 제구력 좋은 투수라도 실투는 나오게 마련이고, 하나씩은 공이 빠질 때도 있으니까요.”

나성범은 투수들보다는 자신의 타격폼을 원인 중 하나로 지목했다. “제 타격폼이 약간 몸을 숙이는 형태에요. 수그리다 보면 몸 쪽에 배트가 잘 안 나오니까, 그 때문에 몸쪽을 많이 던지는 게 아닐까 싶어요. 또 제가 타격 스탠스가 크로스 형태를 띄다 보니까, 공이 몸으로 날아오면 피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가 적은 것도 원인인 것 같습니다.” 김정준 위원도 비슷한 견해다. 김 위원은 몸에 맞는 볼이 많기로 유명한 SK 최정을 예로 들어 “안 피하는 게 아니라 못 피하는 것”이라며 “타격 스타일이 크로스로 들어가면 몸쪽 공을 피하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레너드 코페트는 [야구란 무엇인가]의 첫 문장을 '두려움'으로 시작했다. 그만큼 타자의 공에 대한 두려움과 이를 이용하는 투수의 전략이 야구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나성범은 지금 그 두려움과 맞서 싸우는 중이다. (사진=배지헌)

대처할 방법은 없을까. 코치들과 전문가들의 의견은 하나같다. “이겨내야 한다”는 것. 타자로 뛰면서 지금처럼 좋은 활약을 계속하는 이상, 몸쪽 공과의 싸움은 피할 수 없는 시련이다. 일단 공이 무서워서 피하기 시작하면, 그것만큼 상대 투수들이 바라는 일도 없다. 피하는 순간 투수와의 승부에서 지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렇다고 지금처럼 무작정 이승엽의 홈런기록을 능가하는 몸에 맞는 공 신기록을 향해 갈 수도 없는 일. 김정준 위원은 “몸에 맞는 공이 많은 선수치고 야구 오래 하는 선수가 드물다”며 우려를 표했다. 김광림 코치도 “워낙 근육량이 많고 근육이 큰 체구라 계속 몸에 맞으면서도 버텨내고 있다”면서도, “어쩌다 잘못 맞기라도 하면 치명타가 될 수 있다”고 했다.

그래서 김 코치는 나성범에게 “맞더라도 올바르게 맞는 기술을 익히라”는 역설적인 조언을 한다. “안타깝지만 공을 안 맞을 수는 없어요. 하지만 맞아도 부상을 당하지 않게끔, 홈플레이트 안쪽으로 몸을 잘 말아서 가능하면 바깥 근육이 맞게 하는 법을 익혀야 할 것 같아요. 순발력이 있는 친구니까 충분히 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NC 코칭스태프도 나성범의 몸에 맞는 공이 부상으로 이어지지 않게 만전을 기하고 있다. 롯데와의 경기에서 장원준의 공에 등을 맞고 주저앉은 뒤, 김경문 감독은 곧장 나성범을 대주자로 교체했다. 또 LG와의 경기에서는 연타석 홈런을 친 뒤 바로 게임에서 빼면서 ‘만일의 사태’에 대비했다. 다음날 LG 리즈는 첫 타석에 들어선 나성범을 몸에 맞는 공으로 내보냈다.

나성범은 “저도 사람이라 몸에 맞고 나면 아픈 것은 사실”이라고 웃으며 말했다. “근육이 많아서 덜 아플 것 같다고도 하시는데 전혀 그렇지 않아요. 저도 정말 아픕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공에 대한 두려움에 굴복할 생각은 전혀 없다. “몸쪽 공이 두렵거나 하지는 않습니다. 몸에 맞고 나간 다음번 타석에서 또 몸쪽 공이 날아와도, 위협적이지 않습니다. 그냥 바깥쪽 공과 마찬가지로 몸쪽에 붙는 공이구나, 하고 생각해요. 두려워하거나 약한 모습을 보이면 안 되잖아요. 이겨내야죠.”



나성범은 김경문 감독과 코칭스태프, 그리고 선수단을 물심양면으로 도와주는 구단 직원들에 대한 감사를 꼭 써달라고 당부했다. 팀내 최고 스타로 부각되면서 다소 들뜨거나 어깨에 힘이 들어갈 만도 한데, 처음이나 지금이나 한결같이 겸손함을 잃지 않고 있다. (사진=배지헌)

온 몸이 파스 자국 투성이가 되는 고통을 매일 겪으면서도, 나성범이 타석에서 당당할 수 있는 비결은 무엇일까. 나성범은 “마산 홈 구장에서 팬들의 응원 속에 경기하는 게 힘이 된다”고 이야기한다. “다른 구장에서 관중이 없는 가운데 경기할 때는 흥도 나지 않고 경기에 집중도 잘 안 돼요. 홈에서는 집중도 잘 되고 마음이 편합니다. 관중석이 지금보다 더 꽉꽉 들어찼으면 좋겠어요.”

그와 함께 코칭스태프의 무한 신뢰도 나성범이 두려움과의 싸움에서 이길 수 있게 하는 힘이다. 나성범은 19경기를 치르는 동안 단 한 차례도 선발 라인업에서 빠진 적이 없는 유일한 선수다. “감독님께서 저를 믿어주시고, 경기에 계속 내보내 주시잖아요. 코치님들도 좋은 조언을 많이 해 주시구요. 또 구단 직원 분들도 볼 때마다 격려해 주시고 아낌없이 지원을 해 주셔서 야구에만 열심히 전념할 수 있었죠. 항상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나성범은 여러 차례 이야기하고 싶었지만 기회가 없었다면서, 직원들에 대한 감사를 꼭 전해줄 것을 당부했다.

이제 나성범에게 남은 과제는 좌타자의 천적인 좌투수 공략, 그리고 체력과의 싸움이다. “투수를 할 때는 한 경기 나가면 며칠 동안 휴식일이 있었는데, 타자가 된 뒤에는 매일 쉬지 않고 경기에 나가야 하잖아요. 조금 힘든 부분이 있어요.” 하지만 나성범이라면 잘 이겨낼 것이다. 타자에게 가장 무시무시한 적인 ‘두려움’과의 싸움을 이겨내고 있는 그에게는 어떤 어려움도 결코 넘지 못할 장애물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딱! 오늘도 나성범은 또 한번 배트를 크게 휘두른다. 하얀 공이 담장 너머를 향해 까마득하게 날아가는 게 보인다. 그가 날려 보내는 것은, 투수가 던진 공이 아닌 두려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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