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월5일, 씽크패드가 탄생 20주년을 맞았다. IT에도 20년 넘은 회사들이 제법 있고 제품들도 많다. 하지만 씽크패드의 20년은 시장으로서나 개인적으로도 조금은 다른 느낌을 주기에 과거, 현재, 미래의 씽크패드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내 첫 노트북은 1997년 1월에 구입한 씽크패드 560이었다. 국내에서 LG가 LG-IBM이라는 법인을 세우고 내놓은 첫 씽크패드로, 펜티엄 133MHz에 기본 8MB 메모리를 갖춘 12.1인치 노트북이다. 이걸 당시 300만원을 주고 산 걸 생각하면 요즘 컴퓨터 가격은 놀라울 정도다. 씽크패드라 비쌌던 것은 아니라 당시 삼성 센스 노트북도 비슷한 가격대였고 데스크톱 PC도 15인치 CRT 모니터와 함께 구입하면 200만원을 훌쩍 넘던 시절이다.
굳이 무리하면서까지 이 노트북을 구입한 이유는 처음으로 노트북을 보고 충격을 받은 씽크패드 701 때문이었다. 물론 그 전에도 다른 제조사들이 노트북을 만들어 왔다. 크기나 두께를 줄이기는 어려웠고 반대로 화면은 작았기 때문에 요즘 어린이들을 위한 장난감 컴퓨터 모양과 비슷한 제품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던 시기에 IBM이 내놓은 노트북은 좀 달랐다. 노트북은 10인치 화면에 딱 맞췄고 당시로서는 두께도 얇은 편이었다. 이번에 알게 된 사실인데, 노트북에 검은색을 쓴 것도 씽크패드가 처음이었다고 한다.
▲씽크패드 701CS의 버터플라이 키보드 광고 영상이다. 지금 노트북에는 왜 넣지 않는지 궁금할 지경이다.
무엇보다 이 제품에 홀딱 반한 이유는 그 작은 크기를 덮기 위해 쓴 특수한 키보드 때문이다. 화면을 열면 접혔던 키보드가 펼쳐지는 이른바 ‘버터플라이 키보드’다. 덕분에 키보드 크기가 일반 데스크톱용 키보드와 거의 똑같이 맞출 수 있었다. 이런 기계적인 장치를 넣는 것이 쉽지는 않은 일이었겠지만 적어도 IBM은 PC 만드는 기술의 절정으로 지금까지 자랑할 수 있는 제품을 만들어냈다. 당시 삼성도 비슷한 고민을 했는지 내추럴 키보드처럼 열리는 노트북을 내놓기도 했다.
후속 제품으로 나온 씽크패드 560 역시 노트북 디자인으로서는 꽤 충격을 준 제품이다. 12.1인치에 1.86kg, 두께 31mm로 다른 노트북들과 디자인이나 고급스럽기로는 비교 자체가 어려울 정도였다. 지금도 이 씽크패드에 미련이 남는 부분들이 있는데 바로 아날로그 스위치들이다. 딱 세 군데에 들어가 있는데 왼쪽면의 밀어올리는 전원 스위치 LCD 옆의 밝기 조절 슬라이드, 오른쪽 옆의 음량 조절 다이얼 등이다. 전원을 켤 때 느낌부터가 달랐고 부팅과 관계 없이 화면 밝기와 음량을 조절할 수 있었다. 도서관에서 컴퓨터를 켤 때 큰 윈도우 시작음을 내 본 경험이 있다면 실감할 수 있을 것이다. 요즘은 이런 기능들이 모두 키보드 단축키 속으로 들어갔지만 한편으로는 아쉽기도 하다.
▲씽크패드 560은 15년 전
디자인이지만 지금의 X시리즈와 크게 다르지 않다. 이게 씽크패드의 경쟁력이자 레노버의 고민거리기도 하다.
돌아보면 씽크패드는 노트북 시장에 재미있는 요소들을 많이 넣어 왔다. 노트북에 CD롬 드라이브를 처음 넣은 것도 씽크패드의 755CD였고 화면 위에 자그마한 LED 조명을 달아 비행기처럼 어두운 공간에서 키보드만 환하게 비춰주는 씽크라이트도 씽크패드의 기술이다. 지금은 흔해졌지만 하드디스크에 모든 메모리 정보를 보관하는 하이버네이션도 씽크패드에서 그 가능성을 볼 수 있었다. HP나 도시바 일부 노트북에도 쓰였던 트랙포인트, 일명 빨콩도 빼놓을 수 없다. 무엇보다 그 전까지 써오던 ‘IBM 호환 기종’이 아니라 ‘IBM PC’라는 자부심도 심어주었던 것 같다.
그렇게 씽크패드는 독보적인, 그리고 차별화된 이미지를 갖고 있기는 했지만 이후 노트북 시장이 성장해 가면서 많은 제조사들의 노트북들 사이에서 큰 차이점을 드러내기가 쉽지 않았다. 질리지 않는 짙은 검은색 매트 케이스, 손맛 좋은 키보드, 야마토 연구소의 기술력 등을 강조하고 있기는 하지만 ‘세상에서 이게 최고’라는 말을 꺼내기는 어려워졌다. 디자인은 소니나 도시바 등 일본 기업들이 치고 올라왔고 가격으로는 중국, 대만 업체들이 치고 올라왔다. 여전히 기업들은 씽크패드의 T나 X시리즈를 선호했지만 IBM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메인프레임과 유닉스 시스템, 그 관련 소프트웨어들을 판매해 막대한 수익을 올리고 있던 IBM은 이런 PC 사업은 손이 많이 가고 수지타산이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바로 요즘 HP가 겪고 있는 고민 그 자체다. IBM은 그 고민을 아주 일찌감치 털어냈다. 결국 IBM은 2005년 PC사업부를 중국의 레노버에 매각했다. HP나 델 등에 당시 선두 기업에 대신 중국의 무명 업체에 판매한 데에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무엇보다 씽크패드를 통해 중국시장에 진출할 장벽을 하나 허물려는 것이 가장 큰 의도였을 것이다.
하지만 당시 시장의 걱정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마니아층이 두터웠던 씽크패드였기에 더 했을지 모르겠다. 품질 문제부터 브랜드의 자존감, IBM PC의 퇴장 등 온갖 근심들을 씽크패드와 함께 끌어안은 것이 2005년의 레노버다. 하지만 이 회사는 씽크패드 브랜드를 손에 쥐고 급격히 성장했다. HP와 델이 엎치락뒤치락하고 있는 PC시장을 비웃기라도 하듯 매년 큼직한 발걸음을 떼어 왔다. 특히 급성장하는 중국의 내수 시장을 기반으로 1위 HP를 위협하고 있다. 그런 중국의 현재 PC 보급률이 현재 20%도 되지 않는다고 하니 모든 PC 관련 업계가 중국과 레노버의 움직임을 주시하지 않을 수 없다. 3분기 실적 발표에 전세계가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는 이유는 중국 시장과 레노버의 폭발력을 지켜볼 수 있는 기회이기 때문이다. 20번째 생일 선물로 세계를 놀라게 할 깜짝 성적을 내심 기대하고 있는 것이 오늘의 레노버다.
씽크패드가 IBM의 것이냐, 레노버의 것이냐를 고민하기 시작한 것도 벌써 7년이 되어 가고 있다. 씽크패드 20년 역사의 3분의 1을 레노버가 만들어 온 셈이다. 이제는 더 이상 씽크패드를 두고 IBM을 떠올리거나 품질을 걱정하지 않는다. 그렇게 씽크패드는 자연스럽게 레노버가 되었다.
레노버에 인수된 씽크패드는 다양한 시도와 전통의 고집을 함께 가져왔다. 레노버는 씽크패드의 특징들을 가볍게 해석한 아이디어 패드를 내놓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씽크패드의 고집을 꾸준히 이어가는 모습이다. 물론 키보드가 달라지고 트랙포인트만을 고집하지도 않는다. 심지어 새빨간 씽크패드가 나오기도 했지만 씽크패드를 상징하는 X나 T시리즈는 10년전이나 지금이나 일관된 인상을 심어준다. 오랫만에 써도 익숙한 노트북, 그리고 무엇보다 걱정하던 ‘신뢰할 수 있는’ 제품을 만들어주고 있다.
이렇게 레노버가 씽크패드의 유전자를 잘 이어가고 있는 것은 높이 살만하다. 하지만 한편으로 IBM이 만들어준 틀 밖으로 나서지 못하고 있다는 점을 부정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일본의 야마토 연구소에서 전통적인 씽크패드의 색깔을 만들고 있는 것처럼 다른 연구소들도 각자의 색깔을 내야 할 시기다. 중국 시장이 레노버와 향후 10년 씽크패드의 곳간같은 역할을 할 것이라는 예상을 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지만 10년 뒤에도 세계 시장에서 현재의 씽크패드 색깔만으로 살아남을 수 있을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무거운 이야기로 끝을 맺긴 했지만 씽크패드의 20주년은 기념하고 축하할 만한 일이다. 20주년을 맞아 레노버가 각 미디어들에게 돌린 생일 자축 케익이 근래 그 어떤 것보다 가슴 한 켠을 뭉클하게 만들었다. 비단 레노버 뿐 아니라 PC를 두고 고민하고 있는 많은 기업들이 어깨를 펼 수 있기를 바라본다.
'모바일&IT > IT' 카테고리의 다른 글
리눅스배우기 -2장. 소프트웨어의 기초 (0) | 2012.10.31 |
---|---|
리눅스배우기 -1장. 하드웨어의 기초 (0) | 2012.10.31 |
리눅스배우기 - 3장. 메모리 관리 (Memory Management) (0) | 2012.10.31 |
네임서버란? (0) | 2012.10.15 |
유튜브가 광고 채널을 기업에서 일반 이용자에게로 넓힐 모양이다. (0) | 2012.10.12 |
"애플, 해도 너무하네" 소니·도시바의 눈물 (0) | 2012.10.07 |
Windows Server 2003에서 DNS 서버 설치 및 구성 / 백업 및 복원 (0) | 2012.09.15 |
[아이폰5 공개]잡스가 봤다면?…美 혹평 쏟아져 (0) | 2012.09.13 |
스티브잡스, 프레젠테이션에 왕도는 없다! (0) | 2012.09.03 |
11년 전 나를 사로잡은 안철수연구소의 기업문화 (0) | 2012.09.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