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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서 많이 보던 모습이다.
일단 볼넷이 없다. 초구부터 150km에 가까운 강속구를 뿌리고 고속 슬라이더로 윽박지른다. 타자들의 방망이를 헛돌고 탈삼진은 우수수. 그러니 투구수도 적어 완투형에 가깝다. 80~90년 대를 풍미한 괴물 선동렬이 아니다. 그의 제자인 윤석민이 보여주는 2012년 현재형 모습이다.
지난 17일 목동구장에서 열린 넥센과 경기 2-1로 앞선 9회말 2사후 마운드에 선 윤석민의 얼굴은 평온했다. 완투를 앞둔 투수같지 않았다. 마지막 타자를 삼구 삼진으로 돌려세운 윤석민은 팔을 가볍게 들고 자축했다. 헛스윙을 유도하며 14번째 삼진을 잡은 볼은 142km짜리 고속 슬라이더였다.
14개의 탈삼진은 프로 데뷔 후 개인 최다 기록이다. 투구수는 불과 103개. 초구부터 공격적인 승부를 펼쳤다. 볼넷과 사구도 없었으니 깔끔한 피칭이었다. 경기가 끝날 때 시계는 밤 8시 56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불과 2시간 26분 만에 경기를 끝내 동료들에게 더 많은 휴식시간을 선사했다.
작년 투수 4관왕을 거머쥐고 에이스의 반열에 오른 그는 올해도 쾌투를 펼치고 있다. 개막 이후 2경기 모두 압권의 투구를 했다. 10일 광주 삼성전에서 8이닝 동안 단 1안타(2볼넷)만 맞고 11삼진을 뽑아내며 무실점으로 막았다. 그때 투구수는 107개에 불과했다. 더 던질 수도 있었지만 첫 경기여서 9회에 내렸을 뿐이었다.
거슬러 올라가면 해태의 괴물 선동렬이 80~90년대 마운드에서 줄기차게 보여주었던 투구와 일맥상통했다. 그 때 선동렬은 홈런을 맞거나 점수를 주는 게 뉴스가 될 정도였다. 상대 타자를 압도하는 공격적 투구, 헛스윙 탈삼진과 0점대 방어율(85년부터 7년 연속 방어율왕)이 트레이드 마크였다.
윤석민은 두 경기에서 17이닝을 던져 단 1점만 내주었다. 삼진은 무려 25개. 그가 원하는 방어율, 탈삼진 2연패를 향해 시동을 걸었다. 무엇보다 마운드에서 흔들림 없이 상대를 압도하는 정신력과 자신감이 달라졌다. 또 한 명의 괴물 류현진과 흥미로운 대결을 펼칠 것으로 보인다.
윤석민은 "어릴 때 일본에서 뛰었던 선동렬 감독님과 메이저리거 박찬호 선배의 투구를 보면서 프로선수의 꿈을 키웠다"고 밝힌 바 있다. 그는 이날 괴물의 DNA를 이어받은 투구를 했다. 그것도 바로 선동렬이 지켜보는 앞에서.
KIA 윤석민은 17일 서울 목동구장에서 열린 경기에서 넥센 히어로즈를 맞아 3피안타 1실점으로 완투승을 거뒀다. 특히 14탈삼진을 잡아내면서 사사구는 하나도 기록하지 않는 완벽한 피칭으로 강한 인상을 남겼다.
이날 넥센의 유일한 득점은 2회 터진 박병호의 솔로홈런이었다. 3회부터 9회까지는 윤석민의 벽을 넘지 못했다. 단 한 번의 찬스는 6회에 찾아왔다. 선두타자 허도환이 2루타를 치고 나갔다. 1-2로 뒤지던 넥센 입장에서는 동점 혹은 역전으로 갈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다음 타자는 9번 서건창. 김시진 감독의 작전은 번트였다. 번트로 2루주자를 3루까지 진루시킨 뒤 후속타자들의 안타가 터지지 않더라도 1번 장기영의 외야 플라이나 땅볼 등으로 한 점을 짜내겠다는 계산이 깔려 있는 시도였다.
다시 처음 상황으로 돌아와 보자. 당시 넥센은 한 점을 뒤지고 있었다. 김 감독의 구상대로 1점을 추가하더라도 2-2 동점이 되는 상황이다.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의 법칙은 야구에도 적용된다. 김 감독은 역전할 수 있는 적은 확률 대신 동점을 만들 수 있는 조금 더 큰 확률에 매달렸다.
다시말해 6회 넥센은 역전을 노리기보다 동점을 노린 것이다. 동점을 만든 후 불펜 싸움에서는 뒤지지 않는 계산이 섰을 수도 있다. 이날 윤석민의 구위를 감안했을 때 단번에 역전까지 하겠다는 것은 큰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도박같은 선택일 확률이 컸다. 김 감독은 상황에 맞게 합리적인 선택을 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작전 수행에 문제가 생겼고, 후속 타자들이 삼진으로 침묵하며 김 감독의 선택은 결과론에 의해 의미가 없어졌다.
여기서 결과에 관계없이 흥미로운 것은 윤석민의 빼어난 구위와 정확한 제구력이 넥센 스스로 역전의 가능성을 포기하게 만들었다는 점이다. 넥센은 언제 올지 모르는 ‘윤석민이 물러난 이후’를 승부처로 그리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윤석민이 끝까지 마운드에서 버티면서 넥센의 꿈도 이뤄지지 못했다. 역전의 기대마저 단념케 하고 동점에 만족하게 만들 정도로 이날 윤석민의 투구는 완벽에 가까웠다.
17일 경기에서 KIA 타이거즈는 넥센 히어로즈와 투수전 끝에 2-1로 신승했다. 1점차 승부였기에 살얼음판을 걷는 분위기였어야 했으나, 실제 분위기는 그렇지 않았다. 윤석민의 신들린 투구에 넥센 타자들의 방망이는 허공을 가르기 일쑤였다.
1실점 완투승을 거둔 윤석민은 이날 삼진을 14개나 잡으며 사사구는 하나도 기록하지 않는 완벽한 구위와 제구의 조합을 보여줬다. 투구수도 많지 않아 9이닝을 103개만 던지며 막았다. 에이스가 무엇인지 몸소 보여준 투구였다.
KIA 입장에서 보면 이날 윤석민의 승리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가장 고무적인 것은 2득점에 그치고도 1승을 추가했다는 점이다. 2점만 얻고 경기에서 이기기는 쉽지 않다. 일반적인 흐름이었다면 빈공에 그치며 패하는 경기를 했을 확률이 높다. 하지만 이날 KIA는 2점만 가지고도 승리하며 5할 승률(4승 4패)에 올라섰다.
또 한 가지 도움이 되는 부분은 불펜의 소모 없이 이겼다는 점이다. 선동열 감독은 지난 주말 LG와의 3연전 마지막 경기인 15일 경기를 앞두고 "불펜의 필승조 선수들이 연투하고 있다"며 걱정했다. 이어 "연투한 투수들은 무조건 투입하지 않겠다"고 말하며 불펜의 핵심 선수들을 관리하며 활용하겠다는 계획을 밝힌 바 있다.
17일 경기에서 KIA는 필승조는 물론 추격조 한 명도 쓰지 않고 넥센을 꺾었다. 이로써 힘을 비축한 KIA 불펜은 이번주 남은 5경기에서 더욱 전력투구하며 승수 쌓기에 주력할 수 있게 됐다. 특히 이번주 마지막 경기인 오는 22일 경기에는 다시 윤석민의 등판이 예상돼 탄력적인 불펜 운영도 가능해졌다.
에이스들의 가치는 단순히 실점을 막는 것에만 있지 않다. 훌륭한 에이스들은 많은 이닝을 책임지며 불펜의 부담을 덜어준다. 그러면서 불펜 투수들보다 7, 8회를 실점 없이 잘 버텨준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메이저리그(MLB) 디트로이트 타이거즈의 저스틴 벌랜더다. 벌랜더는 지난해 34경기에 등판해 24승 5패, 평균자책점 2.40을 기록했다. 이와 더불어 251이닝을 소화했다. 경기당 7.38이닝을 던졌다. 디트로이트 불펜은 벌랜더가 등판하는 날 가볍게 던지거나 쉬고, 나머지 투수들이 나오는 경기에 힘을 쏟으며 팀 전체 승수를 더 많이 쌓아나갈 수 있었다. 이러한 벌랜더의 활약으로 디트로이트는 지난해 95승 67패로 아메리칸리그 중부지구 1위에 올랐다.
표면적으로 드러난 성적과 팀에 기여하는 보이지 않는 부분까지 갖춘 에이스 벌랜더는 지난해 사이영상과 MVP를 동시에 석권했다. 24승과 2.40의 평균자책점이 벌랜더에게 사이영상을 안겨줬다면, MVP 수상은 251이닝을 홀로 버텨 줬기에 가능했다. 그야말로 MVP(가장 가치 있는 선수)라는 말에 걸맞는 활약이었다.
윤석민의 가치도 겉으로 드러나는 것 못지않게 보이지 않는 곳에 숨어 있다. 14탈삼진보다 값진 것은 어쩌면 9이닝 완투일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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