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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이야기/hot-이슈

중앙 현관엔 초대형 사진... 전두환 모교 기막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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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가그리 자랑스러워서...한심하다...

전재산 29만원 두환아 돈값아야지.....

손녀결혼식비용만 1억원이 넘는다면서....

  
▲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의 시인 이상화로 상징되는 도시 대구, 국채보상운동의 대구, 대한광복회의 모태였던 대구, 1956년 대통령 선거 때는 72% 이상의 시민들이 조봉암을 지지했던 대구, 1960년 교원노조의 발상지였던 대구, 4월혁명의 도화선인 2.28학생운동을 일으켰던 대구, 해방직후 '1946년의 대구'를 역사에 안은 대구... 그러나 2007년 대선 때는 야당후보를 6%만 지지했던 대구... 위의 사진은 2.28학생의거를 보도한 신문기사를 바탕으로 주동학교인 경북고 교정의 기념탑(왼쪽)과 대구고 교정의 기념탑(오른쪽)을 배치한 모습이다.
ⓒ 정만진
 2.28

우리나라에서 대통령 선거가 처음 실시된 때는 1948년이다. 국회 간접선거였다. 따라서 지역별 투표 성향이 어떠했는지는 전혀 알 수 없다.

 

대구 지역의 투표 성향을 상징적으로 드러낸 대선은 1956년에 실시된 3대 대통령 선거였다. 이승만과 조봉암의 1대 1 경선이었는데, 부정선거가 횡행한 이 선거에서 이승만은 70.0%의 표를 얻어 당선됐다. 야권 후보인 조봉암은 30.0% 득표했다. 그런데 대구는 전국적 결과와 정반대의 투표 성향을 보였다. 이승만은 27.7%의 지지를 얻었다. 훗날 이승만이 사형시킨 조봉암에게는 72.3%의 지지를 보냈다.

 

4월혁명 이후 실시된 1960년의 4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윤보선이 당선됐다. 그러나 이 선거는 초대 때와 유사하게 치러진 국회 간선이었다. 지역별 투표성향을 가늠할 자료를 제공해주는 대선은 아니었다는 이야기다.

 

15만6026표라는 근소한 차이로 당락이 갈린 1963년 5대 대선에서 박정희는 전남(광주시 포함), 전북, 경북(대구시 포함), 경남, 부산, 제주에서 이겼다. 윤보선은 서울, 경기(인천시 포함), 강원, 충북, 충남에서 승리했다. 표 차이가 가장 적은 지역은 부산(3696표)이었고, 표 차이가 가장 컸던 지역은 서울(43만425표)이었다. 호남과 영남 모두 박정희를 더 지지했고, 이외의 지역은 윤보선이 이겼다. 어찌보면 이때까지만 해도 영호남 사이의 '지역 감정'은 없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본래 지역감정이란 게 없었는데...

 

  
▲ 1963년의 대선 포스터 중 박정희 민주공화당 후보와 윤보선 신민당 후보의 벽보. 이 선거에서 박정희 후보는 윤보선 후보보다 전국 종합 1.5% 더 득표했는데, 대구에서는 7.2% 차이로 눌렀다. 이 선거는 우리나라에 최초로 '지역감정 유발 투표'를 조장한 정치공작이 작동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 중앙선거관리위원회
 박정희

하지만 정치권이 지역감정을 대통령 선거의 득표전략으로 처음 악용한 것은 5·16군사쿠데타 이후 실시된 1963년의 5대 대선, 바로 이때부터였다. <역사 속의 대구, 대구사람들>을 저술한 대구경북역사연구회의 젊은 사학자들은 "(1956년의) 제3대 대통령 선거에서 진보당의 조봉암 후보에게 압도적 지지를 보냈던 대구경북에서 4월혁명을 부정하는 5·16군사쿠데타를 주도한 박정희에게 높은 지지를 보인 급격한 의식의 변화는 지역감정을 지적하지 않고서는 그 이유를 설명하기 어렵다"고 진단한다.

 

5대 대선에서 박정희는 전국 평균 46.6%의 득표를 얻어 득표율 45.1%의 윤보선을 간신히 눌렀다. 그러나 대구는 51.2%가 박정희를, 44%가 윤보선을 지지했다. 전국은 1.5%P, 대구는 7.2%P 차이였다.

 

공화당 대구 유세에서 박정희는 "나는 경상도 사나이" "대구 기질" 등을 운운했고, 민관식은 "경상도 사람은 왜 대통령을 못하느냐"고 부르짖었으며, 이효상은 "우리는 신라 1천 년의 찬란한 문화를 자랑하는 고장이지만 그 긍지를 잇는 이 고장의 임금은 여태껏 한 번도 없었다. 박정희 후보는 신라 임금님의 자랑스런 후손이며 이제는 그를 대통령으로 뽑아 이 고장 사람으로 천년만의 임금님을 모시자"고 선동했다. <역사 속의 대구, 대구사람들>은 정치인들의 이런 발언들이 지역감정을 부추긴 사단이었다고 평가한다.

 

당시 대구는 서울, 부산과 함께 3대 도시로 불렸다. 그렇다고 해서 대구의 득표 결과를 서울의 34.9%P 차이(윤보선 65.1%, 박정희 30.2%)에 견줄 일은 아니다. 다만 같은 영남 지방인 경북(대구 포함)과 경남(부산 포함), 대구와 부산을 서로 비교할 때에는 이야기가 다르다. 경북과 경남 전체의 야권 지지 성향은 비슷했다(경북이 1.6%P 높은 수준). 그러나 대구와 부산 두 도시만 견줄 때에는 7.2%P 차이 대 0.8%P 차이로 부산의 야권 지지 성향이 6.4%P 더 높았다. 대도시인 부산이 0.8%P 차이(박정희 50.4%, 윤보선 49.6%)를 드러낸 데 비하면 대구의 7.2%P 차이(박정희 51.2%, 윤보선 44%)는 상대적으로 큰 격차였다는 말이다.

 

부산과 경남, 대구와 경북을 서로 대비해봐도 결론은 마찬가지다. 경남(부산 포함)은 박정희 57.6%, 윤보선 35.5%로 22.1%P 차이였지만, 부산만 따로 떼어서 살펴보면 박정희 50.4%, 윤보선 49.6%로 0.8%P 차이에 지나지 않았다. 부산을 포함한 경남 전체의 22.1% 차이에 견줘 21.3%P나 적었던 것이다.

 

그런가 하면 경북(대구 포함)은 박정희 55.6%, 윤보선 36.1%로 (경남의 22.1%P에 비해 1.6%P 작은) 19.5%P 차이가 났다. 대구만 떼서 보면 박정희 51.2%, 윤보선 44%로 (부산의 0.8%P에 비해 6.4%P 많은) 7.2%P 차이를 기록했다(12.3%P 차이). 도시 자체와 주변 농어촌의 투표 성향을 비교할 때 부산은 주변 농어촌에 비해 21.3%P 높은 야권 지지 성향을 보여준 반면, 대구는 12.3%P만 높았던 것이다(9%P 차이). 결론은, 어떤 셈법을 동원하든 정치인들의 지역감정 부추기기는 대구에서 유난히 효력을 발휘했다는 것이다.    

 
지역감정 부추기기, 1963년 공화당이 시작

 

  
▲ 경북대학교 사범대학 부속고등학교 교정의 박정희 어록비에는 "내 一生 祖國과 民族을 爲하여"라는 그의 붓글씨가 새겨져 있다.
ⓒ 정만진
 박정희

1967년 6대 대선은 박정희 51.5%, 윤보선 40.9%로 전국에서 113만 표 차이가 났다. 이때 박정희는 대구경북에서 63만 표, 경남부산에서 55만 표, 전남광주에서 3만 표 더 얻었다. 전남광주에서도 박정희가 이겼으니 지금과는 다른 득표 양상이었다. 이때 박정희는 대구에서 71.5%로 압승하여 23.5%에 머문 윤보선을 48%P 압도했다.

 

1971년 7대 대선에서 박정희는 53.2%를 얻어 45.3% 득표한 김대중을 눌렀다. 대구에서는 박정희 67%, 김대중 32%로 나타났다. 하지만 김대중은 전국적으로는 물론 대구에서도 윤보선보다 뛰어난 득표력을 보였다. 이는 결국, 이승만이 조봉암을 '법정 살인'으로 제거한 것처럼, 일본에 머물던 김대중을 납치해 동해에 수장하려다 미국의 감시 탓에 뜻을 이루지 못하고 국내로 강제 귀국시키는 사건으로 나타났다.

 

그 이후 1972년 8대부터 1981년 12대까지는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박정희, 박정희, 최규하, 전두환, 또 전두환을 내리 선출했으므로 지역적 투표성향 분석에는 도움이 되는 선거가 아니었다.

 

다시 1987년이 돼 직선제가 적용됐다. 13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노태우 36.6%, 김영삼 28.0%, 김대중 27.1% 득표했다. 대구에서 김대중은 불과 2.6%를 얻는 데 그쳤다. 하지만 또 다른 야당 후보인 김영삼이 24.0%를 얻었으므로 야권 지지 성향은 모두 26.6%로 봐도 무방할 것이다. 이는 1967년의 23.5%(윤보선), 1971년의 32.3%(김대중)와 견줄 때 중간 정도의 성적이었다.

 

매 선거마다 줄어드는 대구의 '야권 성향'

 

1992년 14대 대선 때 야당 후보 김대중은 대구에서 7.8%를 얻는 데 그친다. 다만 또 다른 야당 후보 정주영이 19.2%를 얻어 분석에는 논란의 여지가 남아 있다. 그런가 하면, 1997년 15대 대선에서 김대중은 전국 40.3%를 얻어 당선되지만 대구에서는 12.5% 득표에 머물렀다. 1971년 대선시 박정희와 대결한 김대중이 대구에서 32% 이상의 지지를 받았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 이는 1/3 수준으로 추락한 결과였다.

  

2002년 16대 대선에서 당선자 노무현은 대구에서 18.7%를 얻었다. 지난 선거 때 김대중 당선자가 얻은 득표율보다는 6.2%P 높은 성과였다. 그가 김대중처럼 '전라도 사람'이지 않고 '같은 경상도'인 부산 출생이라는 점과, 대결 상대가 15대의 박정희나 17대의 이명박처럼 경상도 사람이 아니라 충청도의 이회창이라는 점이 일정하게 작용한 결과였던 듯하다.

 

하지만 2007년 17대 대선에서 정동영은 대구에서 단 6.0%밖에 얻지 못했다. 전북 출신인 정동영은 노무현에 비해 지역감정상 약체일 수밖에 없었다. 대구의 표는 이명박과 이회창이 69.4%와 18.1%씩 나눠 가졌지만, 이회창은 1987년 13대 때의 김영삼은 물론 1992년의 정주영에 비해서도 야당 성향으로 볼 사유가 전혀 없었으므로, 정동영의 6.0%는 당시 대구 사람들의 투표 성향을 단적으로 드러내 준 수치였다.

 

가장 근래의 선거인 2012년 4월 11일 총선을 살펴보자. 대구 지역 정당투표에서 민주당은 16.37%, 통합진보당은 7.04%를 얻었다. 합치면 23.41%에 이르는 득표율이었다. 이를 두고 <영남일보> 박재일 정치부장은 지난 4월 18일 치 기사를 통해 "국회의원을 배출하지는 못했지만, 야당이 받은 표의 질(質)을 주목하면서 대구·경북의 정치적 성장쪽에 무게를 두는 이들도 있다"고 평가했다. 물론 총선과 대선은 그 성격이 판이하다는 점에서 4월 11일 총선의 정당 득표율을 자료로 18대 대선 후보자들의 득표율을 점치는 것은 그저 '추정' 행위를 해보는 데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교육의 정치 중립' 압도하는 박정희과 전두환

 

  
▲ 대구공고의 교문에 들어서자 마자 만나게 되는 전두환 전 대통령의 기념식수 소나무(왼쪽 사진), 그리고 중앙현관 앞에 좌우 두 그루가 식목되어 있는 기념식수들 중 들어갈 때를 기준으로 보는 좌측의 나무
ⓒ 정만진
 전두환

18대 대선을 200일 앞둔 지난 1일, 대구 시내를 순회하는 '정치 여행'을 해봤다. 대구광역시의 중심지인 반월당에 가서 박정희 어록비부터 봤다. 이 비석에는 '내 一生(일생) 祖國(조국)과 民族(민족)을 爲(위)하여'라는 그의 어록이 친필 붓글씨로 새겨져 있다. 이 비석은 경북대사대부고 교정에 세워져 있다.

 

이 비석은 학교 건물들 사이에 가려 시민들이 잘 볼 수 없는 그런 자리에 있는 게 아니었다. 이 비석은 대로변의 깔끔하게 단장된 잔디밭 가운데 있어, 버스를 타고 지나칠 때도 놓치지 않고 목격할 수 있다. 특히 어록비는 식민지 때에 일제에 저항하여 치열하게 싸우다가 강두안, 장세파, 박제민, 박찬웅, 서진구 등 5명이 옥사하고, 12명이 고문의 후유증으로 타계했으며, 337명 이상이 검거된 대구사범학교 교사와 학생들의 항일정신을 기리는 기념비 바로 옆에 세워져 있어 더욱 눈길을 끈다.

 

문득 5대 대선 때 윤보선의 신민당 측이 박정희를 '남로당 출신'이라고 공격한 사실이 떠오른다. 으레 '색깔론'은 보수 측이 진보 측에 덧씌우기를 하려고 공작할 때 쓰는 것으로 인식되기 마련인데, 1963년의 색깔론 제기는 '사실'을 기반으로 한 것이기는 했지만 진보 측이 보수 측을 공격하는 무기로 사용한 '처음이자 마지막' 사례였다. 어쨌든 이때 신민당은 '대구에는 빨갱이가 많다'는 '실언'까지 했고, 이것이 대구 지역에 역풍을 불러 일으켜 오히려 박정희의 득표율 상승에 도움이 됐다. 또한, 전라도에서도 박정희가 더 많은 표를 얻는 데에 거꾸로 기여했다.

 

'성실한' 교육자, '용기 있는' 혁명가, 누구일까

 

  
▲ 경북대학교 사범대학 현관에 붙어 있는 박정희상. '성실한 교육자' '위대한 혁명가' 등의 해설이 붙어 있다.
ⓒ 정만진
 박정희

개교 이듬해인 1930년에 시작해 1943년까지 대구 지역 최장이자 최대의 독립 운동으로 이어진 대구사범학교 항일운동에 박정희는 참여한 적이 있을까. 궁금하지만, 그렇다고 길에서 갑자기 전문서적을 찾아서 읽어볼 수는 없다. 또, 그는 일본 육사를 다닌 후 만주에서 장교로 근무했다고 하지 않았나. 신민당 측의 공세에도 나오듯이 남로당 전력도 있다고 하지 않았나. 물론 이런 것들을 대구 시내의 도로에서 '탐구'할 도리는 없다.

 

길을 떠나 경북대학교 사범대학 구관으로 가본다. 이곳에도 박정희의 흔적이 남아 있다. 현관에 들어서자 마자 만나게 되는 것은 그의 흉상이다. 아래에 '대한민국 제5, 6, 7대 대통령'으로 시작되는 명문도 새겨져 있다.

 

가난한 농민의 아들

성실한 교육자

용기 있는 혁명가

민족중흥의 위대한 정치인

1937년 이 학교를 졸업하고

1971년 모교를 위하여

이 교사를 세우다

 

지난 1980년 이래 이 흉상을 철거해야 한다는 움직임이 계속됐다. 특히 1980년 4월 19일에는 경북대의 이현근(철학과), 하종호(화공과) 두 학생이 교내에서 진행된 '4.19기념식' 직후 이 흉상을 직접 망치로 떼어내려다가 구속되기도 했다. 또, 일본의 '독도 망언'이 불거질 때면 흉상 철거 움직임은 더 거세지곤 했다. 지난 2005년 4월 4일에는 '친일잔재 청산 대구경북 대학생 운동본부'까지 결성돼 사업의 하나로 이 흉상 철거를 추진하기도 했다. 하지만, 흉상은 지금도 제자리에 있다.

 

전두환 대형사진을 중앙 현관에 걸어둔 학교

 

  
▲ 대구공고 중앙 현관에 게시되어 있는 '모교를 빛낸 인물' 중 한 사람인 전두환 전 대통령. 그의 어깨에 비쳐 있는 '모교를 빛낸 (다른) 인물'들의 크기에 견줄 때 이 학교가 그를 얼마나 숭앙하는지 가늠할 수 있다.
ⓒ 정만진
 전두환

대구에는 논란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건재를 과시 중인 정치적 '물건'이 하나 더 있다. 전두환 전 대통령의 대형 사진이다. 대구공업고등학교 중앙 현관에 실물보다도 더 커다랗게 걸려 있다. 더욱이 이 학교는 지난 5월 30일에 '학교 역사관'을 개관했으면서도 이 사진을 중앙현관에 그대로 두고 있다. 역사관 개관식 때 학교를 방문한 대구지역의 유력자들 눈에는 이 사진이 어떻게 보였을까.

 

이 학교는 교문을 들어서면 수위실을 지나자 마자 커다란 돌비석 둘이 좌우로 놓여 있다. 교훈과 격려문이 새겨진 것들인데, 둘 다 전두환 전 대통령의 휘호이다. 교훈비 오른쪽에는 그가 기념 식수한 큰 소나무가 위용을 자랑하며 서 있다. 뿐만 아니다. 학교 건물 중앙현관 바로 앞에도 두 그루의 기념식수가 좌우에 심어져 있다. 그 나무들을 지나면 대형사진이 나타난다. 학교 건물 옆에는 '일해정'이라는 정자도 있다. 이 학교는 '전두환 역사답사지'로서 손색이 없을 정도다.

 

두 사람에 대한 숭앙에 견주면 노태우 전 대통령을 찾아가는 답사는 '순수한' 편이다. 인위적으로 세워진 어록비, 흉상, 대형사진, 정자, 기념식수 등이 아니라 생가이기 때문. 생가는 왕년의 건설교통부가 지정한 '우리나라의 아름다운 길 100선'에 든 팔공산 한티재 넘는 길의 연장선인 파계사길 오른쪽의 용진마을에 있다.  
 
 
  
▲ 자신이 태어난 집을 바라보고 있는 노태우 전 대통령의 동상
ⓒ 정만진
 노태우

출처 불명인 '노태우 전 대통령 동상'

 

노태우 생가에서는 그의 공부방, 안방, 가구들과 부엌, 외양간 등을 볼 수 있다. 방문객이 드물지 않아 집 앞에는 문화유산해설사가 머무는 사무실도 지어져 있고, 사랑채 마루에는 찾아온 이들을 위한 서명록도 준비돼 있다. 마침 들어가니 60대 부부가 서명을 하고 있었다. 한 보험사에 다닌다는 남성은 '대구사람답게' 생가를 둘러본 소감을 이렇게 말했다.

 
"그 시대 치고는 좋은 집이네, 이만하면."
 
마당 가장 깊은 곳 돌담장 아래에 서 있는 노태우 전 대통령의 동상을 바라본다. 사람 실물 크기의 이 동상은, 본래는 사립문이었던 것으로 여겨지지만 지금은 좌우로 담장만 남아 있는 사이로 들어서는 손님을 멀찍이서 맞이하는 듯한 자세를 하고 있다. 그런데 기이한 것은 누가 이 동상을 세웠는지 아무도 모른다는 점이다.
 
다른 곳도 비슷하겠지만, 대구 역시 알 수 없는 일들이 많다. 가장 대표적인 것은 1956년 제3대 대통령 선거 때 '빨갱이' 후보를 72%나 지지했으면서 2007년 제17대 대선 때는 '민주당' 후보에게 단 6%만 투표한 사실이다. 또, 도시 곳곳에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세 전직 대통령을 기리는 '정치적 풍경'을 만들어놓고 살지만, 그 풍경 속에 '성실한 교육자' '위대한 혁명가' '모교를 빛낸 동문' 등 (논란의 여지가 충분한) 찬사만 배치할 뿐 잘못에 대해서는 일언반구 언급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다가오는 18대 대선에서 대구 사람들은 과연 어떤 성향을 보일까. 물론, 그것 역시 알 수 없는 일이다.
 
  
▲ 노태우 전 대통령의 생가 입구. 팔공산 자락 용진마을에 있다.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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