뭔가그리 자랑스러워서...한심하다... 전재산 29만원 두환아 돈값아야지..... 손녀결혼식비용만 1억원이 넘는다면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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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서 대통령 선거가 처음 실시된 때는 1948년이다. 국회 간접선거였다. 따라서 지역별 투표 성향이 어떠했는지는 전혀 알 수 없다.
대구 지역의 투표 성향을 상징적으로 드러낸 대선은 1956년에 실시된 3대 대통령 선거였다. 이승만과 조봉암의 1대 1 경선이었는데, 부정선거가 횡행한 이 선거에서 이승만은 70.0%의 표를 얻어 당선됐다. 야권 후보인 조봉암은 30.0% 득표했다. 그런데 대구는 전국적 결과와 정반대의 투표 성향을 보였다. 이승만은 27.7%의 지지를 얻었다. 훗날 이승만이 사형시킨 조봉암에게는 72.3%의 지지를 보냈다.
4월혁명 이후 실시된 1960년의 4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윤보선이 당선됐다. 그러나 이 선거는 초대 때와 유사하게 치러진 국회 간선이었다. 지역별 투표성향을 가늠할 자료를 제공해주는 대선은 아니었다는 이야기다.
15만6026표라는 근소한 차이로 당락이 갈린 1963년 5대 대선에서 박정희는 전남(광주시 포함), 전북, 경북(대구시 포함), 경남, 부산, 제주에서 이겼다. 윤보선은 서울, 경기(인천시 포함), 강원, 충북, 충남에서 승리했다. 표 차이가 가장 적은 지역은 부산(3696표)이었고, 표 차이가 가장 컸던 지역은 서울(43만425표)이었다. 호남과 영남 모두 박정희를 더 지지했고, 이외의 지역은 윤보선이 이겼다. 어찌보면 이때까지만 해도 영호남 사이의 '지역 감정'은 없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본래 지역감정이란 게 없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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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정치권이 지역감정을 대통령 선거의 득표전략으로 처음 악용한 것은 5·16군사쿠데타 이후 실시된 1963년의 5대 대선, 바로 이때부터였다. <역사 속의 대구, 대구사람들>을 저술한 대구경북역사연구회의 젊은 사학자들은 "(1956년의) 제3대 대통령 선거에서 진보당의 조봉암 후보에게 압도적 지지를 보냈던 대구경북에서 4월혁명을 부정하는 5·16군사쿠데타를 주도한 박정희에게 높은 지지를 보인 급격한 의식의 변화는 지역감정을 지적하지 않고서는 그 이유를 설명하기 어렵다"고 진단한다.
5대 대선에서 박정희는 전국 평균 46.6%의 득표를 얻어 득표율 45.1%의 윤보선을 간신히 눌렀다. 그러나 대구는 51.2%가 박정희를, 44%가 윤보선을 지지했다. 전국은 1.5%P, 대구는 7.2%P 차이였다.
공화당 대구 유세에서 박정희는 "나는 경상도 사나이" "대구 기질" 등을 운운했고, 민관식은 "경상도 사람은 왜 대통령을 못하느냐"고 부르짖었으며, 이효상은 "우리는 신라 1천 년의 찬란한 문화를 자랑하는 고장이지만 그 긍지를 잇는 이 고장의 임금은 여태껏 한 번도 없었다. 박정희 후보는 신라 임금님의 자랑스런 후손이며 이제는 그를 대통령으로 뽑아 이 고장 사람으로 천년만의 임금님을 모시자"고 선동했다. <역사 속의 대구, 대구사람들>은 정치인들의 이런 발언들이 지역감정을 부추긴 사단이었다고 평가한다.
당시 대구는 서울, 부산과 함께 3대 도시로 불렸다. 그렇다고 해서 대구의 득표 결과를 서울의 34.9%P 차이(윤보선 65.1%, 박정희 30.2%)에 견줄 일은 아니다. 다만 같은 영남 지방인 경북(대구 포함)과 경남(부산 포함), 대구와 부산을 서로 비교할 때에는 이야기가 다르다. 경북과 경남 전체의 야권 지지 성향은 비슷했다(경북이 1.6%P 높은 수준). 그러나 대구와 부산 두 도시만 견줄 때에는 7.2%P 차이 대 0.8%P 차이로 부산의 야권 지지 성향이 6.4%P 더 높았다. 대도시인 부산이 0.8%P 차이(박정희 50.4%, 윤보선 49.6%)를 드러낸 데 비하면 대구의 7.2%P 차이(박정희 51.2%, 윤보선 44%)는 상대적으로 큰 격차였다는 말이다.
부산과 경남, 대구와 경북을 서로 대비해봐도 결론은 마찬가지다. 경남(부산 포함)은 박정희 57.6%, 윤보선 35.5%로 22.1%P 차이였지만, 부산만 따로 떼어서 살펴보면 박정희 50.4%, 윤보선 49.6%로 0.8%P 차이에 지나지 않았다. 부산을 포함한 경남 전체의 22.1% 차이에 견줘 21.3%P나 적었던 것이다.
그런가 하면 경북(대구 포함)은 박정희 55.6%, 윤보선 36.1%로 (경남의 22.1%P에 비해 1.6%P 작은) 19.5%P 차이가 났다. 대구만 떼서 보면 박정희 51.2%, 윤보선 44%로 (부산의 0.8%P에 비해 6.4%P 많은) 7.2%P 차이를 기록했다(12.3%P 차이). 도시 자체와 주변 농어촌의 투표 성향을 비교할 때 부산은 주변 농어촌에 비해 21.3%P 높은 야권 지지 성향을 보여준 반면, 대구는 12.3%P만 높았던 것이다(9%P 차이). 결론은, 어떤 셈법을 동원하든 정치인들의 지역감정 부추기기는 대구에서 유난히 효력을 발휘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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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년 6대 대선은 박정희 51.5%, 윤보선 40.9%로 전국에서 113만 표 차이가 났다. 이때 박정희는 대구경북에서 63만 표, 경남부산에서 55만 표, 전남광주에서 3만 표 더 얻었다. 전남광주에서도 박정희가 이겼으니 지금과는 다른 득표 양상이었다. 이때 박정희는 대구에서 71.5%로 압승하여 23.5%에 머문 윤보선을 48%P 압도했다.
1971년 7대 대선에서 박정희는 53.2%를 얻어 45.3% 득표한 김대중을 눌렀다. 대구에서는 박정희 67%, 김대중 32%로 나타났다. 하지만 김대중은 전국적으로는 물론 대구에서도 윤보선보다 뛰어난 득표력을 보였다. 이는 결국, 이승만이 조봉암을 '법정 살인'으로 제거한 것처럼, 일본에 머물던 김대중을 납치해 동해에 수장하려다 미국의 감시 탓에 뜻을 이루지 못하고 국내로 강제 귀국시키는 사건으로 나타났다.
그 이후 1972년 8대부터 1981년 12대까지는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박정희, 박정희, 최규하, 전두환, 또 전두환을 내리 선출했으므로 지역적 투표성향 분석에는 도움이 되는 선거가 아니었다.
다시 1987년이 돼 직선제가 적용됐다. 13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노태우 36.6%, 김영삼 28.0%, 김대중 27.1% 득표했다. 대구에서 김대중은 불과 2.6%를 얻는 데 그쳤다. 하지만 또 다른 야당 후보인 김영삼이 24.0%를 얻었으므로 야권 지지 성향은 모두 26.6%로 봐도 무방할 것이다. 이는 1967년의 23.5%(윤보선), 1971년의 32.3%(김대중)와 견줄 때 중간 정도의 성적이었다.
매 선거마다 줄어드는 대구의 '야권 성향'
2002년 16대 대선에서 당선자 노무현은 대구에서 18.7%를 얻었다. 지난 선거 때 김대중 당선자가 얻은 득표율보다는 6.2%P 높은 성과였다. 그가 김대중처럼 '전라도 사람'이지 않고 '같은 경상도'인 부산 출생이라는 점과, 대결 상대가 15대의 박정희나 17대의 이명박처럼 경상도 사람이 아니라 충청도의 이회창이라는 점이 일정하게 작용한 결과였던 듯하다.
하지만 2007년 17대 대선에서 정동영은 대구에서 단 6.0%밖에 얻지 못했다. 전북 출신인 정동영은 노무현에 비해 지역감정상 약체일 수밖에 없었다. 대구의 표는 이명박과 이회창이 69.4%와 18.1%씩 나눠 가졌지만, 이회창은 1987년 13대 때의 김영삼은 물론 1992년의 정주영에 비해서도 야당 성향으로 볼 사유가 전혀 없었으므로, 정동영의 6.0%는 당시 대구 사람들의 투표 성향을 단적으로 드러내 준 수치였다.
가장 근래의 선거인 2012년 4월 11일 총선을 살펴보자. 대구 지역 정당투표에서 민주당은 16.37%, 통합진보당은 7.04%를 얻었다. 합치면 23.41%에 이르는 득표율이었다. 이를 두고 <영남일보> 박재일 정치부장은 지난 4월 18일 치 기사를 통해 "국회의원을 배출하지는 못했지만, 야당이 받은 표의 질(質)을 주목하면서 대구·경북의 정치적 성장쪽에 무게를 두는 이들도 있다"고 평가했다. 물론 총선과 대선은 그 성격이 판이하다는 점에서 4월 11일 총선의 정당 득표율을 자료로 18대 대선 후보자들의 득표율을 점치는 것은 그저 '추정' 행위를 해보는 데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교육의 정치 중립' 압도하는 박정희과 전두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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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대 대선을 200일 앞둔 지난 1일, 대구 시내를 순회하는 '정치 여행'을 해봤다. 대구광역시의 중심지인 반월당에 가서 박정희 어록비부터 봤다. 이 비석에는 '내 一生(일생) 祖國(조국)과 民族(민족)을 爲(위)하여'라는 그의 어록이 친필 붓글씨로 새겨져 있다. 이 비석은 경북대사대부고 교정에 세워져 있다.
이 비석은 학교 건물들 사이에 가려 시민들이 잘 볼 수 없는 그런 자리에 있는 게 아니었다. 이 비석은 대로변의 깔끔하게 단장된 잔디밭 가운데 있어, 버스를 타고 지나칠 때도 놓치지 않고 목격할 수 있다. 특히 어록비는 식민지 때에 일제에 저항하여 치열하게 싸우다가 강두안, 장세파, 박제민, 박찬웅, 서진구 등 5명이 옥사하고, 12명이 고문의 후유증으로 타계했으며, 337명 이상이 검거된 대구사범학교 교사와 학생들의 항일정신을 기리는 기념비 바로 옆에 세워져 있어 더욱 눈길을 끈다.
문득 5대 대선 때 윤보선의 신민당 측이 박정희를 '남로당 출신'이라고 공격한 사실이 떠오른다. 으레 '색깔론'은 보수 측이 진보 측에 덧씌우기를 하려고 공작할 때 쓰는 것으로 인식되기 마련인데, 1963년의 색깔론 제기는 '사실'을 기반으로 한 것이기는 했지만 진보 측이 보수 측을 공격하는 무기로 사용한 '처음이자 마지막' 사례였다. 어쨌든 이때 신민당은 '대구에는 빨갱이가 많다'는 '실언'까지 했고, 이것이 대구 지역에 역풍을 불러 일으켜 오히려 박정희의 득표율 상승에 도움이 됐다. 또한, 전라도에서도 박정희가 더 많은 표를 얻는 데에 거꾸로 기여했다.
'성실한' 교육자, '용기 있는' 혁명가, 누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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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교 이듬해인 1930년에 시작해 1943년까지 대구 지역 최장이자 최대의 독립 운동으로 이어진 대구사범학교 항일운동에 박정희는 참여한 적이 있을까. 궁금하지만, 그렇다고 길에서 갑자기 전문서적을 찾아서 읽어볼 수는 없다. 또, 그는 일본 육사를 다닌 후 만주에서 장교로 근무했다고 하지 않았나. 신민당 측의 공세에도 나오듯이 남로당 전력도 있다고 하지 않았나. 물론 이런 것들을 대구 시내의 도로에서 '탐구'할 도리는 없다.
길을 떠나 경북대학교 사범대학 구관으로 가본다. 이곳에도 박정희의 흔적이 남아 있다. 현관에 들어서자 마자 만나게 되는 것은 그의 흉상이다. 아래에 '대한민국 제5, 6, 7대 대통령'으로 시작되는 명문도 새겨져 있다.
가난한 농민의 아들
성실한 교육자
용기 있는 혁명가
민족중흥의 위대한 정치인
1937년 이 학교를 졸업하고
1971년 모교를 위하여
이 교사를 세우다
지난 1980년 이래 이 흉상을 철거해야 한다는 움직임이 계속됐다. 특히 1980년 4월 19일에는 경북대의 이현근(철학과), 하종호(화공과) 두 학생이 교내에서 진행된 '4.19기념식' 직후 이 흉상을 직접 망치로 떼어내려다가 구속되기도 했다. 또, 일본의 '독도 망언'이 불거질 때면 흉상 철거 움직임은 더 거세지곤 했다. 지난 2005년 4월 4일에는 '친일잔재 청산 대구경북 대학생 운동본부'까지 결성돼 사업의 하나로 이 흉상 철거를 추진하기도 했다. 하지만, 흉상은 지금도 제자리에 있다.
전두환 대형사진을 중앙 현관에 걸어둔 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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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에는 논란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건재를 과시 중인 정치적 '물건'이 하나 더 있다. 전두환 전 대통령의 대형 사진이다. 대구공업고등학교 중앙 현관에 실물보다도 더 커다랗게 걸려 있다. 더욱이 이 학교는 지난 5월 30일에 '학교 역사관'을 개관했으면서도 이 사진을 중앙현관에 그대로 두고 있다. 역사관 개관식 때 학교를 방문한 대구지역의 유력자들 눈에는 이 사진이 어떻게 보였을까.
이 학교는 교문을 들어서면 수위실을 지나자 마자 커다란 돌비석 둘이 좌우로 놓여 있다. 교훈과 격려문이 새겨진 것들인데, 둘 다 전두환 전 대통령의 휘호이다. 교훈비 오른쪽에는 그가 기념 식수한 큰 소나무가 위용을 자랑하며 서 있다. 뿐만 아니다. 학교 건물 중앙현관 바로 앞에도 두 그루의 기념식수가 좌우에 심어져 있다. 그 나무들을 지나면 대형사진이 나타난다. 학교 건물 옆에는 '일해정'이라는 정자도 있다. 이 학교는 '전두환 역사답사지'로서 손색이 없을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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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불명인 '노태우 전 대통령 동상'
노태우 생가에서는 그의 공부방, 안방, 가구들과 부엌, 외양간 등을 볼 수 있다. 방문객이 드물지 않아 집 앞에는 문화유산해설사가 머무는 사무실도 지어져 있고, 사랑채 마루에는 찾아온 이들을 위한 서명록도 준비돼 있다. 마침 들어가니 60대 부부가 서명을 하고 있었다. 한 보험사에 다닌다는 남성은 '대구사람답게' 생가를 둘러본 소감을 이렇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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