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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이야기/hot-이슈

서울 주요 지구대·유흥가·지하철역서 본 '술 취한 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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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주요 지구대·유흥가·지하철역서 본 '술 취한 한국']
주정꾼들로 지구대 '몸살' - 수십번 들락날락 상습 주취자, 문 열며 "형님" 경찰 "또 왔냐"
대학가 거리도 '비틀비틀' - 발 밑엔 소주병 나뒹굴고 벤치엔 젊은 남녀 엉켜있어
지하철 막차는 '취객철' - "왜 끌어내냐" 종점마다 시비, 곳곳 토사물… 누운채 대소변도

 

본지 사회부 14명의 기자는 주말과 석가탄신일까지 3일 연휴가 시작되기 전날이던 25일 밤과 26일 새벽 서울시내 주요 지구대·파출소 14곳, 강남대로와 이태원, 신촌·홍대 유흥가, 주요 지하철역을 취재했다. 예상대로 주요 대학가와 유흥가 거리는 술 취한 사람들 세상이었고, 경찰 지구대에는 예외 없이 술 취한 사람들로 빼곡했다. 지하철 막차는 술 취한 사람을 실어나르느라 '취객철'이 됐다. 이나미심리분석연구원 이나미 원장은 "만취는 스스로 행동을 통제할 능력을 상실한 것"이라며 "인권도 중요하지만, 술 취한 사람에게 강하게 벌을 주는 것이 심리적으로도 가장 효과적인 치료 방법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지구대 단골손님들

"형님!"

술에 잔뜩 취한 엄모(36)씨는 26일 새벽 3시 5분쯤 이태원지구대 문을 열자마자 경찰들을 이렇게 불렀다. 경찰들도 엄씨에게 "또 왔느냐"고 했다. 엄씨는 이날 술집에서 안주와 술 2만여원어치를 먹고 돈을 내지 않아 지구대로 끌려왔다. 지금까지 13번에 걸쳐 무전취식(無錢取食)으로 지구대에 끌려왔다고 한다. 엄씨는 지구대를 하도 들락날락한 탓에 휴대전화를 분실했다며 찾아온 민원인에게 지구대 내 화장실 위치까지 설명해주고 있었다. 같은 시각 이태원지구대 인근 고시원에 사는 서모(45·여)씨도 술을 마시다가 다른 손님과 시비가 붙어 지구대에 끌려왔다. 서씨는 경찰들을 '형님'이라고 부른 엄씨와도 경찰서에서 자주 만난 사이였다. 서씨는 엄씨에게 "오빠는 왜 또 왔느냐"며 안부를 물었다.



몸 못 가누는 여성… 26일 오전 1시쯤 서울 강남대로의 한 주차장에서 술에 취한 여성이 주저앉아 남성의 부축을 받고 있다. 이 여성은 인근 술집에서부터 이곳까지 남성의 등에 업혀왔다. /이진한 기자 magnum92@chosun.com
본지 취재팀과 순찰차로 함께 돌아다니던 신촌지구대 송병호 경사는 한 편의점 앞에서 혼자 소주를 3병째 마시던 박모(51)씨를 가리켰다. 송 경사는 "술 취해 옷 벗고 추태 부리기, 기물 파손, 행인에 시비 걸기 등으로 20번 넘게 지구대에 붙들려왔던 상습 주취자"라며 "'동네 왕또라이'로 통한다"고 했다.

◇땅속에서도 취객들은 넘쳤다

"이제부터 전쟁 시작이다." 25일 밤 11시가 지나자 당고개역 이수환 부역장은 이렇게 말했다. 종점인 당고개역에 전철이 들어올 때마다 술에 취한 승객 5~6명이 내리지 않고 "왜 끌어내느냐"며 시비를 걸었다. 26일 새벽 0시 49분 4696호 열차에서는 노랗게 머리를 염색한 20대 남성이 두 명의 역무원에게 끌려나왔다. 역무원은 끌어낸 이 남성을 역 앞 공원 벤치에 잠깐 앉혔다. 술이 좀 깨면 택시를 잡아줄 것이라고 했다. 당고개역 라연태 대리는 "겨울이면 취한 승객들이 동사(凍死)할까 봐 일단 대합실에 재우기도 한다"고 했다.


 

지하철이 안방인줄… 26일 새벽 서울 지하철 4호선 종착역인 당고개역에 지하철이 도착했지만, 이 사실을 모를 정도로 술에 취한 한 남성승객이 홀로 좌석 3개를 차지한 채 잠을 자고 있다. /성형주 기자 foru82@chosun.com
같은 날 새벽 0시 40분쯤 구파발역에서는 회색 양복을 입은 40대 후반 남성이 역무원의 부축을 받고 열차 밖으로 나온 뒤 구토를 시작했다. 옷에 잔뜩 토사물을 묻힌 이 남성이 지하철 엘리베이터를 타자, 큰 여행용 가방을 들고 함께 탔던 20대 여성은 냄새 때문에 오만상을 찌푸렸다. 그 순간 이 남성은 엘리베이터 안에서 또다시 구토를 시작했다. 서울메트로 관계자는 "각 호선별 막차 종착역이 되는 곳은 취객과의 실랑이가 일상적인 풍경이 됐다"고 말했다.

25일 밤 10시 20분쯤 서울메트로 4호선 당고개역에서는 70대 노인 한 명이 잔뜩 술에 취해 승강장 벤치에 누워 있다가 누운 채로 대소변을 봤다.

◇고요했던 대학·직장인 거리, 8시간 만에 환락가로…

25일 밤 11시 40분쯤 서울 신촌 연세로 5~7가 거리 사이에 있던 총 320여명의 행인 중 눈으로 봐도 만취 상태인 사람만 23명이었다. 고성(高聲)을 지르는 사람이 7명, 심하게 지그재그로 걷는 사람이 14명, 토하는 사람이 2명이었다. 한 젊은 연인은 술에 취한 여자친구를 양팔로 껴안고 블루스라도 추듯 길을 걸었다. 불과 8시간여 전인 오후 3시쯤 대학 전공서적을 옆구리에 끼고 돌아다니던 학생들이 대부분이었다. 26일 새벽 0시 40분 신촌 현대백화점 앞 벤치 7개 중 6개는 술 취해 의자에 대(大)자로 뻗어서 자는 학생, 서로 껴안고 자는 연인이 차지했다. 신촌 삼겹살 골목은 10여m마다 취해서 토하는 사람이 보였다.


 

26일 새벽 1시 홍익대학교의 한 노래방 앞길 500m 구간에는 술에 취해 주저앉아 있는 사람의 숫자가 38명이었다. 나뒹구는 소주병을 이곳저곳 발로 차면서 노는 사람도 눈에 띄었다.

직장인이 썰물처럼 빠져나간 서울 강남대로 일대도 취객들이 빈자리를 채웠다. 새벽 0시 30분 강남대로에는 붉은색 헤드기어를 낀 20대 남성이 나타나, 취객들을 상대로 1만원을 주면 2분간 '왼손만 쓰는 인간 샌드백'이 되겠다고 했다. 취객 10여명이 줄을 섰지만 대부분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해 허공에 손만 날리다 돈만 쓰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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