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둑질은 주로 대낮에 이뤄졌다. 타깃은 창문이나 출입문이 열려 있거나 잠금장치가 허술한 집들이었다. 초인종을 눌러본 뒤 대답이 없는 집은 방충망을 뜯고 들어가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임씨는 창문이 열린 서울 이태원동의 주택을 범행 장소로 골랐다. 들어가 보니 외국인 여성 A(32)씨가 혼자 잠을 자고 있었다. 임씨는 스카프로 복면을 한 뒤 칼을 들고 A씨를 위협했다. 겁에 질린 A씨는 서툰 우리말로 애원했지만 임씨는 A씨를 구타한 뒤 기어이 자신의 욕망을 채웠다. 임씨는 A씨의 지갑에서 7만원을 꺼내 유유히 사라졌다.
▲ ‘동작구 발바리’ 임모(47)씨가 빈집털이를 끝내고 이동하던 중 폐쇄회로(CC) TV에 찍힌 사진. |
애초부터 강도 뒤 성폭행을 계획하고 있었기 때문에 우발적으로 범행을 저지르다 잡히는 일반적인 성범죄자들보다 주도면밀했다. 이런 식으로 그는 2005년부터 2009년까지 12차례 성범죄를 저질렀다.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경찰은 ‘동작구 발바리’를 검거하기 위해 총력을 기울였다. 뒤늦게 성폭행에 일정한 패턴이 있다는 점과 ‘170㎝가량 키에 30대 중반’이라는 것까지 파악했다. 그리고 신체 일부분에 이물질을 넣어 보통사람과 확연하게 구별되는 특징이 있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딸이 무심코 뱉은 한마디에 충격을 받은 임씨가 2009년 이후 더 이상 성범죄를 저지르지 않으면서 사건은 미궁에 빠져들 위기에 놓였다.
●발바리에서 빈집털이로…‘남의 집’ 출근해 번 돈, 어디다 썼나
성범죄는 그만뒀지만 임씨의 도둑질은 계속됐다. 매일 남의 집으로 ‘출근’ 하면서 아내에게 건네준 생활비는 1주일에 50만원 정도. 그럭저럭 입에 풀칠은 가능한 수준이었다. 임씨가 150여차례 절도를 통해 훔친 돈은 무려 3억원 가까이 됐다. 현금 뿐 아니라 귀금속, 상품권부터 노트북, 명품가방까지 돈이 될만한 것들은 싹쓸이를 했다. 장물들은 남대문 등에서 현금으로 바꿨다. 그는 집에 건넨 생활비 외에 나머지 돈은 경마 등 도박에 쏟아부었다.
수사는 지지부진했다. 임씨가 주변에 폐쇄회로(CC) TV가 없는 집을 주로 노렸고 범행 때 꼭 장갑을 착용해 지문을 남기지 않았다.
하지만 경찰도 포기하지 않았다. 지난해 말 수사팀은 고전적인 방법을 선택했다. 빈집털이가 자주 일어난 곳을 중심으로 형사들을 배치해 잠복근무를 시작했다. 그 그물망에 임씨가 덜컥 걸려 들었다. 강도미수·절도 전과자였던 임씨는 ‘동작구 발바리’의 용의선상에 올랐던 적이 있었다. 임씨를 알아본 경찰은 곧바로 미행을 시작했다.
버스를 타고 이동하던 임씨가 내린 곳은 경륜장이었다. 그는 이곳에서 훔친 수표를 환전했다. 하루에도 수천명이 오가는 경륜장이라면 도난 수표의 흐름을 파악하기 쉽지 않은 게 사실. 이렇게 바꾼 돈으로 임씨는 경륜에 베팅을 했다.
여러해 동안 동작구 일대를 털어온 도둑의 정체가 임씨임을 확신한 경찰은 곧바로 체포영장과 압수수색 영장을 발부받아 지난 15일 검거했다. 형사들이 들이닥친 그의 집에는 아직 처리하지 못한 귀금속 110여점과 명품 핸드백 10여점이 그대로 쌓여있었다.
●서울의 마지막 발바리, 덜미 잡히는 순간
임씨는 절도 혐의에 대해서는 순순히 자백을 했다. 이미 물증이 확보된 상황에서 부인해 봐야 아무 소용이 없을 것이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성폭행 혐의에 대해서는 입을 굳게 다물었다. 이미 오랜 시간이 지난 상황에서 자신을 범인으로 몰 수 있는 증거가 남아있지 않을 것이라는 계산에서였다.
그러나 이건 그만의 생각이었다. 경찰은 이미 피해 여성들로부터 성폭행범의 신체적 특징을 파악해 놓은 것은 물론 채액 샘플까지 준비한 상태였다. 임씨의 구강 상피세포를 채취한 경찰은 국립과학수사연구원에 유전자 감식을 의뢰했다. 예상대로 DNA가 정확하게 일치했다. ‘동작구 발바리’의 독특한 신체적 특징도 임씨에게서 발견됐다. 구석에 몰린 임씨는 쏟아지는 증거와 잇단 추궁에 결국 무릎을 꿇었다. 서울의 마지막 발바리가 드디어 덜미를 잡히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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