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식인풍습.
식인풍습.
제가 노신의 아큐정전을 읽다가 식인에 대한 망상이
나오더군요. 그래서 관련글을 찾다가 찾은 글입니다...
영화 <신장개업>을 보면 괴기스러운 분위기의 아방궁이라는 ‘중국집’은 자장면 맛이 일품이다. 그 원인은? 경쟁업체에서 추적하여
알아보니 인육, 즉 사람고기를 썼기 때문이었다.
우리 나라에서 ‘중국집’으로 불리는 중화요리 식당은 음식 맛이 좋을 때 흔히
‘인육을 쓴다’는 루머가 흘러나오기 일쑤였다. 그런데 실제로 중국인들은 청조 말까지 인육을 시장에서 거래했고, 중화민국을 거쳐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된 직후까지도 일부 지방에서는 인육을 먹었다!
식인문화는 중국 4천년 역사에 면면히 이어져 내려왔다. 한나라가 건국된 기원전
206년부터 청나라가 멸망한 1912년까지, 중국에서는 식인의 기록이 220차례나 정사(正史)에 기록되어 있다.
중국의 식인풍습이 생겨난 배경과 전파 경로
중국에서 식인풍습이 생겨나게 된 배경은 다음과
같다.
중원을 차지하기 위해 벌어진 군벌들 간의 전쟁과 잔혹한 형벌,
사람을 잡아먹는 형벌이 성문법으로 제정된 것,
황하를
중심으로 일어났던 자연재해 및 기근,
농업기술의 낙후로 인한 식량부족 등의 여러 요인이 중국의 식인문화를 형성하게 되었다.
잦은 기근과 전란으로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굶어 죽었던 관계로 민중들은 먹고 살기 위해 식인풍습을 자연스레 받아들였고 이런 풍습은
너무나 당연하게 민중들에게 인식되어 갔다.
전쟁에서 패한 적들의 수장은 승자들이 먹는 "고기요리"가 되었고. 정쟁에서 희생당한
정치인의 고기도 요리되어 승자의 먹이가 됐다. 그런데 우두머리만 "고기요리"가 된 것이 아니었다.
전쟁에서 패해 포로가 된
적병들이나 백성들도 "고기요리"가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전쟁 중에는 상황에 따라서 백성들이 대량 징발당해 하루에 수 백명 많게는 수 천명이
"군대의 식량"으로 사용되기도 했는데 중국의 역사를 살펴보면 이런 상황은 정말 흔하게 벌어졌다.
식인풍습은 변방이나 미개지가 아닌 인구밀집 지역에서 흔하게 벌어졌고 중국역사에서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였던 장안, 낙양, 개봉,
북경, 남경, 양주, 항주 등의 대도시들이 곧 식인문화의 중심지였다. 또한 중국문명의 발전과 그 식인풍습의 전파는 족적이 서로 일치하는
비례관계가 있다.
식인문화의 시작은 거의 대부분 황하유역의 산동, 하남, 하북, 산서, 섬서성이 중심이었고 시대가 흐름에 따라
점차 남쪽으로 남하해가는 특징을 찾을 수 있는데 중국문화의 전파에 따라 황하유역에서 장강을 넘어 산동, 복건성일대로 퍼져갔다.
그
경로는 중국인들의 강남개발과 이주의 역사와 함께 하는데, 즉 사람들이 많이 이주한 지역은 과잉개발에 의한 자연환경의 파괴로 자연생태학적 균형이
깨져 기근이 발생하며 이에 따라 식인현상이 발생하게 되는 것이었다.
예를 들면 한나라 시대 고조 2년부터 흥평 원년에 이르는 400년
동안 식인현상은 대부분 중국문명의 시작인 황하일대에서만 발견되었지만 흥평 2년 이후에는 장강(양자강)일대에서도 발생하고, 점차 강남, 광동,
복건성에까지 식인현상이 나타나게 되는데 이것은 중국세력이 남하한 3-4세기 이후 동진시대 이후의 일이었다.
정치사에서의 중국 식인풍습 사례
식인풍습은 앞서 말했듯이 중국 역사에서 면면히 이어져
내려왔으며, 한나라가 건국된 기원전
206년부터 청나라가 멸망한 1912년까지, 식인의 기록은 220차례나 정사(正史)에 등장하고
있다.
최초의 식인 이야기는 중국의 전설적인 왕조인 하나라 당시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아들을 죽인 원수를 죽여 육장(肉醬)을 만들어
원수의 아들에게 먹기를 강요한 여인 이야기다.
유교는 ‘복수주의’를 인정할 뿐 아니라 오히려 장려한 면이 있어 복수에 의한 식인행위가 있었다. ‘부모의 원수와는 같은 하늘 아래 살 수 없다(‘불구대천’, 不俱戴天)’는 생각으로 심하면 부친의 원수를 29대까지 갚기도 했다.
복수할 때는 한 칼에 숨통을 끊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천 갈래, 만 갈래로 잘랐으며 때로는 고기를 잘라먹고 심장과 간을 꺼내어 씹어먹으며 뼈까지 갈아먹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황제는 법률로 ‘살육의 형’을 규정했다. 이는 주나라 때의 율령 체제부터 등장하지만 이전에도 마찬가지였다. 중국은 고대 이전부터
강력한 왕권을 중심으로 한 정치 체제를 가지고 있었는데 이것을 유지하기 위해 엄격한 법령들을 만들었다.
이 법령에는 ‘일벌백계’의 효과를
위해 끔찍하고 잔혹한 형벌들이 포함되어 있었는데, 이중 ‘살육의 형’이 규정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다름 아닌 ‘식인의
형’이며 정식으로는 주나라 시기의 율령부터 등장했지만, 전 왕조인 은나라 때에 이미 죄수의 살점을 도려내 다른 죄수에게 먹이는 형벌이
존재했었다. 이 '식인의 형'은 제왕의 권위에 도전하는 자에게 내리는 벌로서 은나라부터 시작된 이 식인형은 중국역사에 면면히 이어져 내려왔다.
정사에 최초로 기록된 식인사례(사마천의 사기에 기록된 내용)는 중국왕조사의 대표적 폭군인 '은(殷)나라 주왕'의 사례이다.
정사에 최초로 기록된 식인사례 <사마천의 사기(史記)에 기록된 내용>는 중국 최초의 역사왕조인 은(殷) 왕조(주나라 이전의 왕조)의 마지막 임금이자 중국왕조사의 대표적 폭군인 주왕'의 사례로, 신하들을 ‘해’( , 인체를 잘게 썰어 누룩과 소금에 절인 고기), ‘포’(脯, 저며서 말린 고기), ‘자’(炙, 구운 고기)로 만들었다고 기록했다. 해, 포, 자는 이후 중국 춘추전국시대까지의 인육 조리법의 대표격으로 계속 등장한다.
주왕은 대신인 구후의 딸이 절세미인이란 말을 듣고 아내로 삼았는데 그 아내가 너무 정숙해 자신의 성적인 취향에 맞지 않자 격노해 그녀를
살해하고 그녀의 아버지 구후를 해(醢:인육을 소금에 절인 육젓)로 만들어 먹어버렸다.
신하인 곽후가 이를 강력히 말리자 주왕은
곽후 또한 포(脯:찢어 말린고기)로 만들어 먹었고, 그 외에도 주왕은 자신에게 간하는 신하 익후를 자(炙:불고기)로 만들어 먹어버리는가 하면
신하인 황비호의 아내 경씨를 희롱하다 거절 당하자 그녀를 해로 만들어 남편인 황비호에게 하사하고 먹게 하는 끔찍한 짓까지 저질렀다. 이 치욕을
가슴에 담아 둔 황비호는 훗날 군사를 일으켜 주왕을 시해하게 되었다.
한고조 유방은 천하를 통일한 후, 팽월에게 역모죄를 씌워
죽인 후 간장에 절여 육장을 만들어 신하들에게 나누어 주었고, 삼국시대 당시 유비는 인육으로 만든 "포"를 즐겨 먹었으며 (진수의 정사 삼국지에
기록되어 있다.) 조조에게 패한 여포는 살해되어 그 고기가 죄수들의 입 속으로 들어가기도 했다.
그리고 수 양제는 자신에게 거역하는
신하를 삶은 뒤 그 국물을 문무백관에게 내려 마시게 했었다.
자치통감 '당기'편에 보면 측천무후 집권시기에 탐관오리였던 내준신이
식인형을 당했는데 군중들(내준신에게 처형당한 이들의 가족들)이 다투어 내준신의 고기를 산채로 잘라 먹어 눈 깜짝할 사이에 동이 났다. 눈알을
도려내고 안면의 가죽을 벗겼으며 배를 찢고 심장을 끌어내니 마침내 진흙 같은 찌꺼기만 남았다고 전해진다.
명대의 명장 원숭환
장군은 청의 황제 황태극의 계략으로 역적누명을 쓰고 처형당했는데 군중들이 몰려와 그의 살점을 발라가는 바람에 뒤늦게 시신을 수습하러 온 원숭환의
부하들은 뼈밖에 수거할 수 밖에 없었다.
공자에 얽힌 이야기
춘추시대 노나라 사람인 공자는 이 ‘해( )’를 즐겨서 해 없이는 식사를 안 했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중국의 고전서인 예기,
동주열국지, 논어 등에 언급) 그러나 공자가 아끼던 제자 자로가 위나라의 신하로 있다가 왕위다툼에 휘말려 살해되고, 그의 시체는 잘게
토막내어져 해로 만들어지고 말았다. 이 해는 사자에 의해 공자의 식탁에까지 전해졌다. 이 일 후로 공자는 그렇게 좋아하던 해를 먹지 않았다.
(혹자는 공자가 '해'를 좋아했다는 기록을 보고 인육을 즐겼다고 주장하나, 당시 '해'는 음식의 한 유형이었으므로 지나친 비약으로 볼 수
있다. 공자가 ‘해’를 즐겼다는 기록은 있으나 인육을 즐겨 먹었다는 기록은 없다)
중국 역사사회에서는 생존경쟁의 패자가 승자의
먹이로 식탁에 오르는 일이 다반사였다. 그리고 충성심을 보이기 위해 식인이 자행되기도 했다. 춘추전국시대의 유명한 제나라 환공은 미식가로도
유명했다. 그가 진미를 찾자 요리사인 역아(易牙)는 자기의 장남을 잡아서 삶아 바쳤다. 역아뿐 아니라 극한 상황에서는 자기 살을 베어내거나
아내나 자식을 잡아 주군을 대접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고, 흔히 이런 경우는 충성으로 기려졌다.
당나라 시대의 식인 풍습
수·당대에는 인육시장이 출현했고, 인육애호가가 열전(列傳)에
기록되기도 했다.
과거 중국의 미식가(美食家)들은 식도락을 추구하기 위해 사람고기를 상육(想肉)이라고 부르면서 즐겨 먹었는데 원나라의 도종의가 지은
‘철경록(輟耕錄)’이나 송나라 장작이 지은 ‘계륵편’에는 사람고기를 요리하는 방법이 상세히 나와 있다.
후대로 갈수록 맛으로
인육을 먹는 습관은 대다수 민중들에게까지 널리 퍼져 인육을 장에서 공공연히 사고 팔며 아무 거리낌 없이 그 맛을 즐기게 되었다.
‘신용문객잔’으로 대표되는 흑점이 존재했던 것이 사실이었던 것이다.
(*흑점이란 사람의 발길이 잘 미치지 않는 외진 곳에 있는
음식점으로 나그네들이 살해되어 그 음식점의 요리가 되었다. 이런 흑점은 20세기 중반에 일어났던 문화대혁명 시대까지 존재했었는데 모택동의 지시로
이 흑점들이 다 소탕되었다.)
중국 식인풍습의 절정은 당나라 시기로, 당시 세계적인 대제국으로 성장한 당나라는 고급 귀족문화가
크게 발달했으며 끊임없는 귀족들의 특미(特味)추구를 만족시키기 위해 본격적으로 인육을 요리재료로 쓰기 시작했다.
이 때의
인육애호가가 열전(列傳)에 기록되기도 했는데, ‘철경록(輟耕錄)’에는 친구를 젓갈로 만들어 먹은 설진, 자기의 첩을 삶아 먹은 고찬의 이야기들이
나온다.
‘조야첨재’ 에도 병중에 자기 노비의 고기를 먹은 독고장 등이 나오는데 모두 이 무렵의 인물들이었다.
그리고 철경록에 수록된 내용에 인육 중에 가장 비싼 고기는 兒肉(어린 아이)이었는데 그
이유는 부드럽기 때문에 여러 요리에 쓸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음으로 女肉, 男肉, 老肉이었다고 한다. 늙은이의 고기가 쌌던 이유는 탄력성이
없고 질겨서 국거리용으로 밖에 쓰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당나라 시기 이전에는 인육이 암시장에서 몰래 유통되었지만 당나라 때는 전국
각지에 상육(인육)을 판매하는 시장이 생겨 공개적으로 거래를 하게 되었다. (양주(楊州)와 봉상(鳳翔)은 당나라의 대표적인 상설 인육시장이 있던
곳이다)
인육은 납치, 인신매매 등으로 공급이 되었으며 또 중죄수들을 인육으로 만들곤 했는데, 억울하게 인육이 된 사람이 상당히
많았다고 한다. 여자의 경우 외모가 괜찮으면 기방으로 팔려가지만, 얼굴이 변변치 못하고 일을 할 만큼 튼실하지도 못하면 인육이 되었다.
측천무후 때는 식인문화의 극성기로 보통 인육은 두 발 달린 양고기라 불렸으며 인육이 너무 많이 유통되어 다른 고기값을 폭락시킬
정도였다. 인육의 값은 쌀값보다 싸고 개고기의 1/5 정도의 가격 밖에 안 되었다.(*말그대로 사람이 개만도 못한 셈이었다.)
당나라 말 ‘황소의 난’이 일어났을 때 당나라 군대에는 인육을 가공하는 기계가 등장했고 군대가 행군하는 길에 붙잡힌 사람들은 모두
인육이 되어 병사들의 식량으로 쓰여졌으며 반란을 일으킨 절도사의 군대가 마을을 습격해 사람들을 잡아 먹기도 했다.
송나라 이후의 식인풍습
당나라 말기, 5대 10국 시대의 혼란기를 거치고 송나라가 들어섰지만
인육판매는 더욱 더 기승하였다.
한때 송나라에서 인육의 판매를 금지했지만 실효를 거두지 못하고 흐지부지하다가 그 법이 폐기되면서 명나라를
거쳐 청나라 말기에 이르기까지 인육은 시장에서 공공연히 매매되었다.
송 이후 원나라가 들어섰을 때도 식인풍습은 계속 남아있었고 마르코
폴로는 자신이 직접 목격한 복주(福州)의 식인풍습을 '동방견문록'에 기록하였다.
"...이
지방에서 특별히 기록할 만한 것은 주민들이 그 어떤 불결한 것이라도 가리지 않고 먹는다는
사실이다. 사람의 고기라도 병으로 죽은 것만
아니면 아무렇지 않게 먹는다. 횡사한 사람의 고기라면 무엇이건 즐겁고 맛있게 먹는다.
병사들은 잔인하기 짝이 없다.
그들은 머리
앞부분을 깎고 얼굴에 파란 표식을 하고 다니면서 창칼로 닥치는 대로 사람들을 죽인 뒤, 제일 먼저 피를 빨아먹고 그 다음 인육을 먹는다. 이들은
틈만 나면 사람들을 죽여 그 피와 고기를 먹을 기회를 엿보고 있다..."
인육은 당나라 시대 이후 중국의 식문화의
하나로 자리잡았고 어느 시대에서나 다른 고기보다 저렴한 고기로 취급되었다.
명나라때 사천에서는 인육이 남자일 경우 한 근에 7전,
여자의 경우는 8전에 거래되었고 개봉과 중경 등지에서 대규모의 인육시장이 개설되었고 죄인이 처형당하는 사형장에서 민중들은 사형수의 고기를
얻어와서 먹기도 했다.
명나라 때의 식인풍습은 청나라에 와서도 그 명맥을 이어갔다.
청나라 시절 안경에는 대규모 인육 시장이 개설되었고 말기에는
말레이시아산 인육(?)을 수입하여 대나무 바구니에 담아 판매하기도 했는데 한족들은 이 고기를 보약으로 몸보신을 했다고 한다.
증국번의
일기를 보면 1860년 강소성에서 인육은 한 근에 90전이었는데(명나라때 보다 가격이 인상되었다.) 태평천국의 난으로 인플레현상이 발생하여
130전까지 폭등했다는 기록이 있다.
인육은 약용이다??
인육은 가끔 약용으로도 쓰였다. 이시진의 <본초강목(本草綱目)>에는 인체 각 부위의 약효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통념에다 ‘효’라는 유교 사상의 실행으로서, 병으로 죽어가는 부모에게 자신의 넓적다리살 등을 잘라서 봉양하는 일은 더욱 흔했다. 단, 이런 일이
진정한 효행인가 하는 정치적인 논란이 벌어지기도 했는데, 당시의 황제 뜻에 따라 어떤 시대의 사람들은 ‘효자’로 표창을 받았고, 다른 시대
사람들은 신체를 훼손한 ‘불효자‘로서 매를 맞은 후 귀양을 갔다.
중국의 식인 풍습은 <삼국지>,
<수호지>, <서유기> 등 유명한 중국 고대의 소설에도 잘 나타나 있다.
<삼국지>의 경우, 정사로 기록된 진수의 삼국지에는 유비가 즐겨먹은 음식이 인육으로 만든 포였다고 하며, 여포가 죽은 후 그 고기를 죄인들에게 먹였다고 한다.
소설 <수호지>에서는 인육으로 고기만두를 만들어 파는 악한이 등장하고, <서유기>에서는 고승(高僧)의 고기가
불로장생의 영약이라 하여 삼장법사가 끊임없이 요괴들의 공격을 받는 장면이 나온다.
1918년, 중국 근대의 사상가 노신은
<광인일기(狂人日記)>에 식인의 피해망상증에 걸린 광인을 주인공으로 등장시켜 식인 풍습이 만연한 사회상을 폭로했다.
그는 또한 ‘국가는 사람이 사람을 먹는 역사사회‘라고 정의한 바 있다. 중국 5·4운동의 사상적 지도자 오우(吳虞, 1874∼1949)는 ‘유교 = 식인’이라 하며 강력히 유교를 비판했다. 식인풍습은 공산화된 중국에서 유교의 폐해 중 하나로 비판되었고, 최근에 이르러서야 점차 사라져갔다. 오랜 역사와 문화를 자랑해 온, 유교문화의 종주국인 중국에서 식인 풍습이 꾸준히 이어져 내려왔다는 것은 이해하기 힘든 역사의 단면이다.
근대 중국의 식인풍습
신해혁명으로 청나라가 멸망한 후에도 식인풍습의 잔재는 남아있었다.
노신의 "광인일기(狂人日記)를 보면 식인에 대한 공포로 피해망상증에 걸린 광인을 주인공으로 등장시켜 식인풍습이 만연한 당시 사회의 모습을
비판했다.
또한 20세기 초 중국의 군벌시대에 인육이 90전에 거래되었다는 기록을 보면 식인풍습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던 것 같다.
외국에서도 중국인이 모여 사는 곳에서는 인육이 판매되었는데 1919년 러시아의 수도 모스크바에서 중국인들이 인육 장사를 하다가 당국에 적발되어
총살됐던 일도 있었다.
중국의 식인풍습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식인풍습은 5천여년간 합법적으로 존재했고 일반인들 사이에서도 널리 행해졌습니다. 불과 얼마전 문화대혁명으로 홍위병이 날뛰던 시기에도 중국
전역에 광범위하게 식인풍습이 실존했으며 신용문객잔으로 대표되는 흑점이 존재했던것도 사실입니다. 지금 나이 30-40대에 속하는 층 일부는
그당시에 태어났을테고 그런 사회분위기 및 오랜 전통이 그들 사고에 영향을 미쳤으리라 판단하고 나름대로 분석한 것인데요.
광인일기에
나타나는 주인공의 과대망상증은 노신이 정신병자를 묘사한것이 아니라 중국에서의 실제상황을 그대로 전하려했다는 점을 상기하시면 이해가 쉬우시리라
생각되어 집니다.(주인공은 주변 이웃이 자신을 살해하여 잡아먹으려한다는 피해망상증환자로 나옵니다.) 노신이 아큐근성(노예근성)과 식인풍습이
중국을 망치는 2대악으로 보고 이것을 근절하려고 얼마나 노력했는가를 보면 이 문제가 얼마나 심각한 문제였는가를 짐작할수 있겠습니다.
중국인은 왜 남을 믿지 못하는가? 왜 돈을 중시하는가? 왜 먹는것에 집착하는가? 왜 돈앞에선 적전분열하는가? 왜 눈앞에서 사람이
쓰러져 죽어가도 여러사람이 주변에 삥둘러서 무표정하게 바라보기만 할 뿐 조치를 취하지 않는 그 특유의 무관심은 어디서 나오는가? 왜 중국의
대가족제도는 3대뿐아니라 주변 친인척이 한집에서 모여사는가? 왜 부모자식간에도 못믿는가? 그 엄청난 인내심의 근거는 무엇인가? 중국계 기업의
조직문화는 왜 친인척위주인가(그래서 중국계 기업의 수명은 다른나라 기업에 비해 짧습니다.) 등등의 문제 저변엔 식인풍습으로 인한 중국인이 인간을
바라보는 기본적인 관점이 큰 작용을 했다라고 봅니다.
(노신은 중국인은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는다라고 했습니다.)
부연설명이 없어서 이해가 잘되실지 모르지만 짧게 짧게 몇가지만 대충 추려말씀드리자면 오랜기간의 식인풍습은 노신의 말대로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게 만들고 신의라는 것 자체를 없애 버렸습니다. 중국인들이 신의를 말할때면 그들이 가장 위기에 몰렸을때입니다. 그때만 예나 도덕
신의등이 나옵니다.
식인풍습 즉 약육강식의 단순한 논리는 그들의 특징적인 속성..즉 강자앞에선 토끼가 되고 약자 앞에선 무서운
맹수가 되어버리는..을 잘 설명해주는 근거가 아닐까요? 일단 전쟁, 기근으로 식인풍습이 대대적으로 시작되면 잡아먹히는 인간의 종류와 순서에
일정한 법칙이 있었습니다. 일단 유괴하기 쉬운 어린이를 시작으로 여행자, 독신자 및 독거노인등으로 순서가 옮겨갑니다.
나중엔
비교적 소규모의 가족단위를 이루는..즉 처치하기 쉬운 가정이 다음차례가 되고 비슷한 규모의 가족단위간에는 관에 줄이있어 파벌에 속한자가 속한
가정이 그렇지 못한 가정을 잡아먹고.. 맨 마지막 단계에 가면 부모가 자식을.. 남편이 아내를.. 형이 동생을 잡아먹었습니다. 중국 특유의
대가족제도는 제가 보기엔 결국 식인풍습으로 부터 자기자신과 가족을 지켜내려는 눈물겨운 제도이며 여러명이 뭉쳐서 숫적우위를 바탕으로 잡아먹힐
확률을 낮추고 생존확률을 높이려는데 주목적이 있다는것입니다. 잡아먹히는 순서상 쪽수가 많은 가정이 맨 나중에 속했기 때문입니다.
토루는 중국 송나라 때부터 지어졌다. 전란과 재해, 각종 습격에 대비하여 이런 형태의 가옥구조가
생겨났다
사진은 복건성에 있는 전통가옥 토루
다음은 인내력에 대해 살펴보면..그들의 인내력을 임어당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임어당은 중국특유의 대가족제도.. 삼대뿐아니라
외삼촌가족 숙부가족 고모가족 등등 그 많은 수의 가족이 한 가옥내에 살면서 여러사람과 부딛치면서 받는 스트레스를 참아내면서 그들의 인내력이
성장했다고 말을하였습니다. 즉 식인풍습은 중국특유의 대가족제도를 만들어내고 대가족제도는 구성원에게 매우큰 인내를 강요했습니다.
식인풍습이 발생하게 된 명분은 제가 말하대로 고대중국부터 형벌의 하나로 성문법화 된것 이외에 중국 특유의 황제제도, 식인의 미화,
등이 있었겠지만 가장 큰 직접원인은 식량부족이었습니다. 그당시 식량이란것은 지금의 식량이란 가치나 개념과는 큰 차이가 있으리라 생각되어집니다.
즉..식량=목숨이란 공식이 성립하였을것이라 생각되어집니다. 현대에 들어서 농업기술이 발달하고난 이후에 그 당시의 식량과 현재의
식량과는 다른 정도의 가치가 있을지 모르지만 그당시의 식량과 동일한 가치를 갖는것을 현대에서 찾자면 그건 바로 "돈"이 아닐까요?
많은 사람들이 중국인은 날때부터 장사꾼이라 돈을 밝힌다라고 합니다만 저는 그들이 "돈때문에 장사꾼이 되었다"고 보는 시각입니다.
오랜 전통의 식인풍습은 그들로 하여금 절박한 생존본능을 추구하게 만들었고 그 본능은 대대로 유전되었으며 세대가 지날수록 더욱더
강력해졌을것입니다.
불과 30-40여년전까지 홍위병이 날뛰던 문화혁명기에 농촌이 붕괴되자 여기저기서 서로 잡아먹는 식인풍습이
존재했던 중국이라면 그 본성과 본능은 지금 세대의 주축을 이루는 30-40대의 핏속에 생생히 살아있을것이고 세상이 바뀌어 식량자체가 문제가 되지
않지만 과거 그들이 서로 잡아먹게 만들었던 그 "식량"과 같은 가치를 가지는 "돈"에 그토록 무섭게 집착하는 이유를 식인풍습과 연계시킨다면 너무
무리한 확대해석일까요?
식인순서의 맨마지막은 부모자식간, 형제간, 부부간에 서로 잡아먹는 순서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과거 식인풍습이
난무하던 시대의 식량과 같은 의미를 갖는 "돈"앞에서 부모자식간, 형제간, 부부간에 서로 믿지 않는 그들의 사고가 전 이해가 아주 잘되는데요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중국인은 일제침략과 내전 그리고 문화혁명등의 혼란기를 겪어서 그렇게 서로 믿지 못하게 되었다고
말씀하시는분들이 있습니다. 한가지 묻죠.. 우리나라는 일제침략이 없었나요? 중국은 절반만 먹혔지만 우리는 아예 35년동안 수탈을 당했습니다.
바로 이어 동족상잔의 비극 6.25사변이 터졌고 또 그이후 4.19... 5.16...장기간의 군사파쇼독재 등등을 겪었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민족은 그들과 다른가요? 제가 생각하기엔 그들이 그지경까지 된것은 우리가 겪은것과는 분명히 강도나 내용이 다른 뭔가가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만..제가 생각한바가 유치할수 있습니다.
결론 그리고 이 글은 자의적인 글인가?
지금까지 몇가지 중국인의 속성을 식인문화와 관련지어 나름대로 분석해낸바를 간단히 정리하여 짧게
올렸습니다. 일단 그다지 학문적이지못하고 자의적인 해석일수 있으며 식인풍습 한가지로 모든것을 설명하려는데 무리가 있을수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이 식인풍습 한가지로 모든것을 해석하려한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어령님이 쓴 "축소지향의 일본인"이란 책을 읽어보신
분들이 계실겁니다. 과거 일본이 잘나가던 시절에 많은 서구인들은 일본인들을 매우 궁금해했고 나름대로 연구하여 국화와 칼등의 저서를 통해 접근하려
했지만 모두다 그들의 속성을 설명하는데는 분명한 거리가 있었습니다.
이어령씨는 일본인의 사고, 문화, 언어습관, 조직의 특징등
모든것을 "무엇이든 축소하여 간단 명료화"시키는 단 한가지 명제를 가지고 그것들을 설명했습니다.
그책을 읽은 서구인들은 경탄을
마지 않았고 일본지식인들도 경탄을 금치 못했던걸로 기억합니다. 한 민족의 문화와 사고를 그토록 예리하게 판단한것이 단 한가지 명제였다는데 무척
놀랐고 그 당사자가 일본인이 아닌 외국인이였다는 사실에 또한번 놀랐고 일부 일본 지식인은 "무섭다"라는 표현까지 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저는 그책을 중학교 2학년때 읽었으며 강한 감동을 받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중국인을 이해할수 없다고 합니다. 과거 서구인, 우리
한국인들이 일본인들 보고 했던 말과 같죠? 도저히 이해할수 없다..제가 식인문화를 중국인을 파악하는데 사용한 "단일명제"로 이용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식인풍습은 중국에서 5천년간 합법적으로 존재했고 그 대상은 황제부터 일반 민초 백성까지 였으며 노신이 그토록 박멸하고
싶어 혼신의 힘을다해 책을 썼을정도로 중국인들 사이에 아무런 저항감없이 널리 퍼져 사람을 "즐겨"먹는것이 중국인들에겐 아무런 흥미거리조차 되지
못했다는것을 상기 하면 이는 분명코 간단히 보아 넘길수 없는 범상치 않는 중국만이 갖는 독특한 문화이며 이는 이어령씨가 일본인들을 분석할때
사용한 일본인만이 갖는 독특한 축소지향의 풍습과 같은 정도의 중요성과 가치를 갖는 중국민족 특유의 풍속이라 생각되어지고 따라서 축소지향의 풍습과
식인풍습은 같은 용도로 사용되어 질수도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여러 책을 읽으며 노신과 오유 그리고 황문웅등이 말한바 "식인풍습은
중국 5천년사를 관통하며 이를 모르고 중국인에 대해 말한다는것은 가소로운 일이다" "중국역사는 식인의 역사다" 라는 말은 저로 하여금 더 큰
확신을 갖게 하였습니다. 중국인들의 사고를 이해하는데는 우리가 그동안 생각했던것보다 훨씬 더 간단명료한 방법이 있는지도 모릅니다. 제 지식이
짧고 경험이 없어 더욱더 학술적으로 논리적으로 전개할수 없었던점은 유감입니다. 하지만 중국을 나름대로 분석하기 시작한지 몇년 안되는 기간에
나름대로 이정도로 판단할수 있는 사고를 가졌다는데는 나름대로 자부하고 있습니다.